▲허형구 17대 검찰총장. 사진은 1989년 2월 145회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대정부 질의에 답변하는 허형구 법무부장관.
연합뉴스
제5공화국 두 번째 검찰총장 허형구. 그는 신헌법이 발효된 지 4개월 보름 뒤인 1981년 3월 10일 제17대 총장에 취임했다. 그는 같은 해 12월 옷을 벗었다.
"저질연탄 사건을 파헤친 뒤 '검찰이 별것 아닌 사건을 확대해 갓 출범한 정부의 공신력을 실추시켰다'는 동력자원부의 주장이 제기되면서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취임 9개월 만인 81년 12월 옷을 벗었다." - '검찰총장 영욕의 수난사', <한겨레>, 1993.9.14.
검정색 연탄이 지금의 도시가스 같았던 그 시절, 허형구 검찰은 삼표·삼천리·대성 같은 제조업체들이 불량 재료를 넣어 폭리를 취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훗날 국회부의장이 되는 박주선 검사, 대법관과 총리 내정자가 되는 안대희 검사가 수사팀인 서울지검 특수1부에 있었다.
1981년 10월 8일 서울지검 수사결과가 발표되자 여론은 검찰에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연탄 제조업체들의 묵은 비리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전두환도 여론 반응에 고무했다. 검찰 성과가 정권의 캐치프레이즈인 '사회정화운동' '정의사회 구현'에 치적으로 활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론도 이 사건을 사회정화·정의사회와 연관시켰다. <동아일보>는 '공직자 정화작업 1년 사정협의회'라는 기사를 통해 "원인을 따져보면 구조적인 문제점이 아직도 사회의 내부 깊숙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만큼, 앞으로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보다 높은 차원의 정의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개혁 작업과 더불어 이들 구조적인 문제점 해결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1981.10.20.).
전두환은 사회적 관심을 이 문제에 집중시키기 위한 행보에 착수했다. 그는 삼천리 연탄공장을 직접 시찰했다. 또 김석휘 서울지검장에게 전화를 걸어 '수사지휘권'까지 행사했다. 당시 검찰청법에도 구체적 사건에 대한 수사지휘권은 법무부장관만이 행사할 수 있었지만, 전두환은 총리, 법무부장관, 검찰총장을 뛰어넘어 서울지검장을 직접 지휘했다.
박주선 당시 검사의 진술에 따르면, 전화기를 든 전두환은 "이런 사건의 배후에는 반드시 공무원이 있다. 그러니 공무원 수사도 해라. 압수수색도 좀 하고 그래라"고 격려성 지시를 내렸다('검찰 징벌 인사와 전두환 시절 저질연탄 사건의 추억', <한겨레>, 2021.1.16.). 검찰은 의욕적으로 수사를 이어갔다. 하지만 며칠 가지 못했다. 칭찬받던 검찰 수사가 갑자기 '표적 수사'니 '먼지떨이 수사'니 '반인권 수사'니 하는 공세에 직면했다.
문제의 발단은 동력자원부 석탄국장 구속이었다. 검찰이 윤석구 국장을 구속시키면서부터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대학등록금이 40만 원 안팎이던 이 시절에 석탄국장이 연탄업체들로부터 받은 뇌물은 1940만 원. 그가 구속되자, 뇌물 공여자들이 대한광업진흥공사 이사장 이규광을 찾아갔다. 이규광은 대통령 부인인 이순자의 작은아버지다. 이후 청와대에서 열린 검사장 오찬 자리에 느닷없이 이순자가 출현했다고 한다. 그는 "죄도 없는 사람을 검찰이 억지로 잡아넣었다"며 검찰 간부들에게 핀잔을 주고 나갔다.
이순자의 반격은 검찰 수사 중단으로 이어졌고, 불똥은 허형구 검찰총장에 튀었다. 허형구는 '해임'이라는 중징계를 당했다. 이때 검사징계법이나 검사징계위원회 같은 것은 가동되지 않았다. 전두환·이순자의 의지만 작동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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