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지난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대국민사과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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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힘겨운 쇄신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쇄신이 힘겨운 것은 그것을 방해하는 힘이 외부에서 작동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힘이 '내부'에서 작동하기 때문인 측면이 크다.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과 관련된 15일자 대국민 사과문도 그런 내부 요인 때문에 불충분한 결과물이 되고 말았다.
이 사과문은 이명박·박근혜의 정경유착과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해 반성하면서도 "민주와 법치가 오히려 퇴행한 작금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끼며 깊이 사과를 드립니다"라며 민주당 정권에도 간접적으로 책임을 돌렸다.
사과문 결론 부분에 "이 작은 사과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겸손의 뜻으로 사용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도 그것은 '작은 사과'였다. 이처럼 반성과 사과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당 쇄신을 가로막는 요인들이 보수정당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유당이 쌍둥이었다는 사실
국민의힘은 1981년 1월 15일 창당된 민주정의당(민정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크게 보면 민주공화당(공화당) 및 자유당과도 맥이 닿는다. 1인 독재자의 집권을 목적으로 창당했다는 점, 기득권층 및 보수층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 등이 같다. 또 이념과 지향점에서도 대동소이하다. 그래서 국민의힘의 구조적 문제점은 민정당뿐 아니라 공화당·자유당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보수정당의 원조인 자유당은 한국전쟁 와중인 1951년 이맘때 창당됐다. 그런데 그해 12월 23일 세워진 이 당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국회의원들을 기반으로 하는 '원내 자유당'과 원외파를 기반으로 하는 '원외 자유당'이 그것이다. 같은 당명을 쓰는 쌍둥이 자유당이 한날 한시에 이승만 대통령한테서 나왔던 것이다.
똑같이 이승만을 구심점으로 하고 똑같이 자유당을 당명으로 쓰는 정당이 두 개나 태어난 것은 내부 진통이 격렬했기 때문이다. 1951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 사설 '발족하는 자유 양(兩)당'은 국회의사당과 동아극장에서 각각 거행된 자유당 발당(창당)대회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분열된 두 개의 신당 운동은 화합을 보지 못한 채 23일에 각기 그 정통을 주장하면서 동명이체의 양 자유당을 결성하였다.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된 원내 자유당 발당대회는 당헌·당강을 통과시키고 중앙위원을 선출하였으나 당 대표의장 선출을 보류한 채 3명의 부의장만 선출한 데 대하여, 원외 자유당 발당대회는 전일 발기인대회에서 이승만 박사를 당수로 선출한 데 이어서 부(副)당수 1명과 상집위원을 선출하였다."
대한민국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될 당시, 이승만은 일종의 탕평주의자였다. 조선 영·정조처럼 그도 정당 무용론을 견지했다. 강력한 대통령을 중심으로 당쟁 없는 국가가 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탕평을 펴려면 당쟁을 억누를 힘이 있어야 했다. 그런 리더십이 없었던 그는 결국 탕평론을 접게 된다. 한국전쟁 26일 전의 제2대 총선에서 자파 후보들이 대거 낙선하자, 그는 현실주의 노선으로 선회했다. 이듬해인 1951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사에서 신당 창당을 언급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열흘 뒤 '신당 조직에 관하여'라는 담화를 통해 창당에 박차를 가한 이승만에게 호응하면서 시작된 것이 자유당 창당 작업이다.
창당 세력은 얼마 안 가 둘로 갈라졌다. 이승만이 국회 양원제 및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표방하면서부터였다. 국회에 자기 세력이 적었던 이승만은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뽑는 기존의 국회 간선제에서는 승산이 없다'는 판단 하에 국회를 둘로 갈라 약화시키는 양원제, 대통령 선출권을 국민들에게 주는 직선제를 추진했다. 직선제를 희망한 것은 국민적 인기가 높아서가 아니라 국회 간선을 일단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승만의 구상은 그를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이 주판알을 튀기도록 만드는 원인이 됐다. 그들 원내파는 국회를 약화시키는 구상이 불만스러웠다. 결국 그들은 이승만의 구상을 전폭 지지하는 원외파와 갈라섰다. 이로 인한 두 파벌의 경쟁이 1951년 12월 23일 두 개의 자유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원내 자유당도 이승만을 지지했지만, 이승만은 원외 자유당을 편들었다. 그는 원외 자유당과 합세해 원내 자유당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이에 따라 원내 자유당원들이 원외 자유당으로 넘어가고 원내 자유당은 1953년에 교섭단체 지위를 잃고 무력해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당은 원외 자유당이 원내 자유당을 흡수한 당이다.
이처럼 대한민국정부 하의 최초의 집권당인 자유당은 오로지 이승만의 집권 연장을 위해 태어났다. 전쟁의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틈타 오로지 집권자를 위해 태어났다. 그런 뒤 현직 대통령이 동원할 수 있는 정치권력과 자금력에 의존해 유지돼 나갔다.
이 때문에 자유당은 국민의 힘이 아닌 집권자의 힘에 의지하는 정당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운영되는 정당을 지향할 필요성을 이들은 느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