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디지(Avery Brundage)는 1886년에 미국에서 태어나 육상선수 활동을 하였고, 1946년 IOC 부위원장이었으며, 1952년부터 1972년까지 IOC 위원장을 지냈다.
대한체육회
그러나 이상백의 바람과 달리 브런디지 위원장은 이를 거절한다. 그는 이상백에게 보낸 답장에서 남북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IOC는 올림픽에 참가하려는 것에 대해 정치적·종교적·인종적으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브런디지 위원장은 이어 'IOC 집행위원회에서 한국 문제가 재논의 된다, 한국 외교관 일부가 몇 가지 공식 성명을 발표했는데 도움이 안된다, 이러한 정치개입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라고 오히려 충고한다. 브런디지 위원장은 남북한의 군사적 문제는 IOC에서 추진하는 단일팀 구성 문제와는 별개이며 남한의 외교 행위를 정치적 행위라고 본 것이다.
KOC 제명하라는 의견까지
홍명희 위원장은 1959년 8월 30일 자 서신에서 오토마이어 사무총장에게 곧 로마 올림픽(1960.8.25~9.11)을 위한 축구 예선전이 시작되는데 남과 북의 단일팀이 출전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며 단일팀 실현을 위한 긍정적인 답변을 바란다고 IOC를 재촉한다.
남한이 단일팀 논의에 응하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자 IOC 내에서는 소련, 불가리아 등 공산권 IOC 위원들을 중심으로 KOC를 제명해야 한다는 의견들까지 나오기 시작한다.
이에 브런디지 위원장은 남한의 KOC가 왜 단일팀 구성을 반대하는지 알지만 단일팀 구성이 안 되면 북한에 따로 참가 기회를 줄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서신을 이상백에게 보낸다.
IOC 내 분위기가 이런데도 KOC는 IOC 총회에서 단일팀 문제로 안건 토의하는 것 자체를 연기해 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무렵은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고 4월 28일에는 이기붕이 사망하며, 정치인 이철승이 새로운 대한체육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남한 내에서 단일팀에 대해 제대로 논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단일팀이 안 되면 남한과 별도로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북한의 요청에도 IOC는 1960년 2월과 8월 두 번의 IOC 총회에서 남북 단일팀 문제를 거론하지 못한다. 이로써 북한의 올림픽 참가 기회는 1964년 도쿄 올림픽(1964.10.10~24)으로 넘어간다.
남한의 요구로 단일팀 논의가 계속 미뤄지자 공산권 IOC 위원들은 남한의 상황이 그렇다면 북한을 따로 올림픽에 참여시켜야 한다며 북한의 요구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자 오토마이어 사무총장은 1962년 1월 10일 KOC에 서신을 보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전달한다.
단일팀 구성을 위한 북한과의 접촉을 제안했는데 또다시 62년까지 일정을 연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도쿄 올림픽까지는 2년 반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니 어떤 의지가 있는지 알려주기 바란다. 북한은 남한과 같이하고 싶어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중략) IOC의 이상과 임무는 인종, 종교, 정치와 무관하게 올림픽에 하나로 참여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총회 이전인 5월 전까지 알려주기 바란다.
오토마이어 사무총장은 브런디지 위원장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남한의 단일팀 구성에 대한 의지를 의심한다. 그는 특히 남한이 정치 문제로 이것을 몰아가고 있다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북한의 홍명희는 남한이 단일팀 구성에 대한 의지가 불확실하므로 DPRK OC라도 올림픽에 참가하도록 더는 지체 말고 도와달라는 의견을 IOC에 전달한다.
북한이 이렇게 계속 단일팀 구성을 요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50년대 후반부터 유엔과 IOC에 제3세계 국가들의 가입이 늘어나면서 사회주의 국가와 제3세계 비동맹국가들과의 강화된 대외 관계가 있었다.
마지못해 단일팀 논의 수락
IOC는 제59차 모스크바 총회에서도 도쿄 올림픽 남북 단일팀 구성문제에 결론을 내지 못했다. 대신에 다음과 같이 1962년 9월 1일로 최종 시한을 적시한 결정을 내린다.
우리로서는 북한올림픽위원회를 공식 게시물 목록에 임시로 올리고, IOC는 남북을 대표하는 단일팀 경기 참가와 관련해 의견을 묻는 서한을 남측 위원회에 보낼 예정이다. 그들의 답변은 1962년 9월 1일까지다. 부정적인 답변이 나올 경우 북한올림픽위원회는 1964년 올림픽에 독립팀(independent team)으로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계속되는 IOC의 압박에 KOC 이상백은 1962년 8월 14일 자 서신에서 브런디지에게 단일팀 구성에 동의한다는 뜻을 처음으로 밝힌다.
우리는 항상 올림픽 이상과 정신을 지켜왔으며, KOC는 단일팀 구성을 동의하기로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당신들과 소통하도록 하겠으며, 다양한 요인이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모든 공식 통신은 IOC 사무국을 통해서만 진행하도록 하겠다.
KOC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단일팀 구성을 반대한다는 비판에 대한 부담감과 그로 인한 북한의 도쿄 올림픽 '독립 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남한은 북한이 국제스포츠 사회에 대등한 자격으로 진출하는 것을 반대해왔다.
1962년 8월 KOC는 회장에 이주일, 부회장에 이효·장기영·이상백 세 명을 선출했다. 이상백과 월터 정 KOC 명예사무총장이 IOC와 주된 교신 역할을 맡아왔는데 5⋅16 쿠데타 이후 KOC에는 군인 출신 정치인과 언론인이 대폭 보강 되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남북 단일팀 논의에 정부 차원의 대응을 하기 위한 조처였다.
당시 남한 정부는 외교부 라인을 동원해 IOC에서 단일팀 문제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한 뒤 정부 내 논의를 통해 단일팀 구성에 동의했다.
이러한 남한의 태도 변화에 대해 오토마이어는 DPRK OC(오토마이어 사무총장은 North Korea라 하지 않고 DPRK라고 했다. 이러한 국호 표기가 일관된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승인 당시 국호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 앞으로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KOC로부터 올림픽에 참가할 단일팀 구성에 동의한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을 알려드리게 되어 기쁘다. 당신이 항상 단일팀 구성에 찬성해 왔듯이, 우리는 이 해결책이 관련된 모두에게 만족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서울위원회는 앞으로 진행될 과정에 대해 우리와 의사소통을 할 것이며, 우리 사무실을 통해 이 주제에 관한 모든 공식적인 의사소통을 할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받은 모든 정보를 당신에게 줄 것이다. 단일팀 성공을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