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무대에 모인 이승만 이기붕 가족(왼쪽부터 이기붕 민의원의장 장남 이강석,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이 대통령, 이기붕 의장, 이 의장 아내 박마리아, 이 의장의 차남 이강욱. 이강석은 이 대통령의 83세 생일에 맞춰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됐다. 1957. 5
국가기록원
당시 이상백(1932년부터 올림픽 임원, 선수단장, 1964년 10월 도쿄 총회에서 IOC 위원으로 선출. 1966년 사망)도 비슷한 논조로 IOC에 서신을 보내 KOC는 한국 NOC를 대표하고 있고, 다른 유사한 조직을 허용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며, 북한과 적대 관계에 있어 공산주의자들과 올림픽팀을 구성하는 것은 어렵다고 전했다. 그리고 몇 년 안에 통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한 위원회를 없애야 하는 난처한 상황이 될 거라고 우려했다.
북한은 1956년 3월 15일 IOC에 'DPRK OC 위원장 궁선홍' 명의로 NOC를 설립했다는 7장의 근거 서류와 함께 IOC가 DPRK OC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DPRK OC의 승인 신청에 대해 IOC 사무총장 오토마이어는 '1국가 1위원회 원칙에 따라 승인해줄 수 없고, 다만 단일팀을 구성하면 올림픽 참가는 가능하다'라고 답신을 했다.
그러자 북한은 '많은 선수들이 올림픽 참가를 열망하고 있으며 앞으로 KOC와 함께 일할 가능성이 확실히 보장되면 한국에 두 개의 NOC는 필요없다'라고 한다. 이어 IOC에 올림픽 참가의 기회를 박탈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남한의 거부로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 북한은 제52차 멜버른 IOC 총회에서 제안한 남북 단일팀 구성이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깨닫게 된다.
북한의 단일팀 제안
그 총회 이후 북한은 1957년 6월 11일 자 <로동신문>을 통해 KOC에 유일한 조선팀을 구성하자고 제안한다. 이 제안이 DPRK OC가 KOC에 보낸 첫 제안이다. 북한은 오토마이어에게도 복사본을 보내 IOC도 이 내용을 인지하도록 했다. <동아일보>는 1957년 6월 13일 자에서 "북한 괴뢰의 올림픽위원회가 남북한 혼성팀(단일팀)을 로마 올림픽에 파견하기를 제안했다"라는 내용의 뉴스를 바로 실었다.
그러나 남한 정부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북한의 궁선홍은 1957년 7월 5일 오토마이어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낸다.
"우리는 11월 멜버른 총회에서 DPRK의 요구가 연기되었다고 들었다. 우리는 IOC 승인을 받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해나가고 있음을 알린다. DPRK는 올림픽에 참가하고 싶은 간절한 바람에서 지난해부터 IOC에 승인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이미 우리는 KOC에 단일팀 구성을 제안했지만 남한은 우리의 제안에 어떤 대답도 없었다.
IOC가 제안한 정당한 제안을 KOC측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함에 주목하면서 KOC는 한국에서 모든 스포츠를 대표할 수 없음을 선언한다. 올림픽의 이상과 원칙으로 선수들을 폭넓게 참여할 수 있도록 조직하지만, 위에서 언급된 이유로 우리가 단일팀을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많은 선수들에게 올림픽 경기에 참가할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따라서 제53차 IOC 총회에서 DPRK 올림픽위원회의 내용을 다시 상정해 줄 것을 요청한다. 우리 위원들을 총회에 파견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이기붕은 IOC에 서신을 보내 북한이 KOC에 서신을 보냈다고 하는데 현재 남과 북은 어떠한 통신수단도 없어서 북한의 서신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IOC는 KOC 및 DPRK OC와 계속 서신을 주고받으며 북한의 올림픽 참가 문제를 IOC 총회와 집행위원회에서 계속 다루어 갔다. 남북 NOC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IOC는 1957년 9월 23일 소피아 총회에서 북한(North Korea) NOC를 '잠정 승인(Provisional Recognition)'한다고 결정했다.
승인조건은 세 가지였다. ① 승인은 남과 북이 단일팀을 만들 때만 유효하며 ② NOC 규칙과 규정을 IOC에 보내주면 검토하여 승인하겠다는 것이고 ③ 이 승인은 한국 내에서만 유효하고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