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7대 총선 당시 노회찬이 여의도 윤중로를 거닐며 선거운동하는 모습.
노회찬재단
[지난 기사] '노회찬 촌철살인',빛 못 볼 뻔한 사연 에서 이어집니다.
TV 토론의 성공 이후 노회찬은 일약 '스타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노회찬은 어깨띠 하나 두르고 당직자들과 함께 점심시간에 맞춰 여의도 국회의사당 옆 윤중로로 거리유세에 나섰다. 장석준은 그날의 풍경을 15년이 지나 이렇게 술회한다(<프레시안>, 2019.4.23.).
"의사당 옆 윤중로는 마침 식사를 마치고 산보를 하거나 벚꽃 축제에 나들이 나온 시민으로 가득했다. 이때 처음 보는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마치 유명 연예인이라도 본 듯 노회찬 후보 앞에 멈춰서고 환호성을 지르며 에워쌌다. 먼저 악수를 청하는가 하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진보정당에게는 전에 없던 경험이었다. TV 토론회에서 노회찬 후보가 일으킨 바람이 실감됐고, 대중정치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 것만 같았다."
노회찬은 "벚꽃 날리는 것이 표 내리는 것 같다"며 당시 분위기를 표현했다. 민주노동당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2004년 3월 28일자 노회찬의 <선대본 일기>는 "힘내라 진달래!"라며 이렇게 적고 있다.
"여의도 나들목 부근은 어느새 밀려온 봄꽃 천지다. 개나리가 듬뿍 피어 있고 벌써 곳곳에서 진달래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3월 28일 아침 여의도. 노란 개나리와 연분홍 진달래꽃이 지금의 열우당과 민주노동당 지지율만큼씩 상륙해 있다. 힘내라, 진달래. 가슴도 눈시울도 연분홍이다."
TV 토론, "보낼 곳은 많고, 선수는 부족하고"
사실 TV 토론에 나간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노회찬의 경우는 총선 이전부터 몇 차례 TV 토론에 나가면서 기본훈련을 이미 마친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해 '운명의' 3월 20일 토론을 앞두고 한 케이블 방송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 최종 점검을 마친 '준비된' 토론자였다.
1인2표가 총선에 처음으로 도입된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TV 토론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2002년 대선에서 쌓은 인지도와 유권자들의 막연한 호감을 표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확실한 이미지 만들기가 필요했고, 이를 위한 유일무이한 방법이 TV 토론이었기 때문이다.
노회찬과 중앙선대본은 당시 TV 토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감을 넘어 절감하고 있었다(김능구, '한국정당실록 60년 인터뷰-노회찬 편', 2009.1.29.).
"특히 TV 토론이 국민여론과 선거에 표심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걸 저희들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2002년 대통령선거 때 TV 토론 나가면서부터 실제로 권영길 후보가 국민여러분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국민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이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떻게 여론을 바꾸어내고 또 인지도를 높여내는가를 저희들이 실감을 했기 때문에 비록 저희들에게 많은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지만은 TV 토론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노회찬은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TV 토론을 "우리의 메시지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 가장 주요한 선거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즉 "저희들이 지역에서 어차피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비례대표에서 의석을 늘릴 가능성이 더 높다면 정당득표를 높이기 위해서는 가장 유력한 것이 TV 토론"이라고 판단한 노회찬은 당 차원의 TV 토론 참여에 큰 공을 들였다.
노회찬이 큰 공을 들였다는, 민주노동당의 TV 토론 참여는 투쟁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토론 참여를 위해 사이버 시위, 언론노조를 통한 압박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하지만 3월 20일 이후에는 상황이 바뀌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노회찬 어록'이 등장했고, 방송사 쪽의 출연 요구를 다 소화하기 어려울 만큼 출연 요청이 당으로 쇄도했다.
문제는 방송 토론에 당장 나설 수 있을 만큼 훈련이 된 정치인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 선대본 문명학 기획조정실장은 이렇게 말한다(정용상 기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이!-TV 토론, 탄핵 수렁에 빠진 민주노동당을 건져내다', <매일노동뉴스>, 2005.8.24.).
"사실 TV 토론에 처음 나가서 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서 실수도 하고, 질타도 받으면서 훈련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실수할 여유가 없었다. 매번 홈런을 쳐야 할 상황이었고, 실제로 매번 홈런, 최소한 장타를 쳤다. 그러고 나니까, 노회찬, 심상정 후보 말고는 다른 사람들은 안 나가려고 하더라. 막판에는 토론 나갈 사람이 없어서 고생했다."
방송토론 섭외와 일정조정, 정책 제공의 실무를 담당했던 김홍석 기조실 부장은 "토론을 소화할 수 있는 정치인이 부족했다. 또 방송사들과의 실랑이 과정이 쉽진 않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정용상 기자, <매일노동뉴스>, 2005.8.24.).
"방송사 쪽에선 단연 노회찬 의원의 출연을 요구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후보이자 선대본부장이었던 만큼 일정 조정도 어려웠고, 계속 한 사람만 내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다음으로 권영길 의원이 많았고, 심상정 의원, 김종철 대변인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다.
기본적으로 쇄도하는 방송출연 요구를 수용할 만큼 '선수'가 많지 않았다. 방송국 관계자들과 말씨름해야 했던 내 입장에선 난처한 일이기도 했다. 토론자가 적절하지 않을 경우 당원들의 반응도 반응이지만, 당장 방송사쪽에서 항의를 많이 받게 된다. '왜 그런 사람을 내보냈냐'는."
"4월 15일 판갈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