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부천의 이버지 강경희의 만세운동 관련 기사
박만순
이후 일제의 미움을 산 박천홍은 딸이 정신대에 끌려가는 아픔을 겪었으며, 큰아들은 해방공간에서 실종되었고, 둘째 아들은 인공시절 송지면사무소(송지면 인민위원회)에 근무했다는 이유로 수복 후에 경찰에게 총살됐다.
강경희의 아들 강부천도 1946년 추수 봉기 때 참여했다는 이유로 갈매기섬에서 학살당했다. 송지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의 자제들이 한국전쟁기 국가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다.(<해남우리신문> 2010년 3월 8일자 기사)
인공 시절 두 사람의 다른 행동
"느그 부모들은 소 안 키우냐? 무고한 사람들 소를 잡아 술판을 벌이냐!"
해남군 송지면 마봉리 인민위원장 강상표가 인민군들한테 겁 없이 항의했다. 인민군은 인공(인민공화국) 초창기에 마봉리 신흥마을에서 소를 끌고 가 송호리 송종마을 해변가에서 술판을 벌였다. 당시 소는 시골에서 재산 목록 1호였다. 그러니 소를 빼앗긴 주민이 강상표에게 억울함을 호소했고, 강상표도 겁도 없이 인민군에게 항의했다. 목숨을 건 행위였지만 정당한 문제제기였기에 인민군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또 강상표는 인공 때 마봉리에서 우익인사 학살을 막아냈다. 그 결과, 마봉리에서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학살은 전혀 없었다. 경찰이 수복하면서 마봉리 부역 혐의자 2명이 학살되었는데, 이는 다른 마을에 비하면 현격히 적은 수였다.
수복 후 경찰이 부역 혐의자들을 검거했을 때, 강상표는 마봉리 인민위원장이었다는 이유로 연행, 송지면 산정지서 유치장에 구금됐다. 송종리 사람들은 소매를 걷어부치고 강상표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그이는 절대 죽일 사람이 아니어라." 송종마을 사람들의 겁 없는(?) 구명운동이었다. 그들은 강상표의 의로운 행위를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북한군 점령 시절, 해남군 송지면 면소재지에서는 지방 좌익이 자신들의 동지를 때려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름 아닌 송지면 노화도 출신인 김민재였는데, 그는 인공 시절 초기에 우익인사 여러 명을 학살했다. 보다 못한 동료들이 그를 죽였는데 지방 좌익들 역시 목숨을 경시하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김민재를 놔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인권'이란 단어는 사치에 불과
하지만 송지면 마봉리 인민위원장 강상표와 면소재지 지방좌익들의 노력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1950년 10월경 경찰은 송지면 산정지서를 수복하고 주민들을 산정국민학교에 모이게 했다. 경찰은 인공 시절 부역 혐의자들에게 자수를 종용해, 그렇게 자수한 이들을 지서 옆 창고 5곳에 구금했다. 이들 400여 명은 나중에 산정리 산진목, 어불도 앞바다, 치소리 쑥고개 등지에서 집단 살해됐다.
"지서에서 가까운 산진목에서 많이 죽였다. 경찰은 총알이 아깝다고 사람들을 어란리 앞바다로 끌고 가 수장시켰다."(강성칠, 80세, 전남 해남군 송지면 마봉리 신흥마을) 한 개 면에서 부역혐의자 400여 명이 학살된 것은 엄청난 규모였다. 그러다 보니 피해를 입지 않은 마을이 없을 정도였다.
송지면 산정리 석수마을은 면소재지에서 가까워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인공 시절 인민위원회에 가담했다. '토지개혁'과 '공동분배'라는 인민군의 주장에 쉽게 공감한 것이다. 수복 후 여타의 집성촌과 달리 유대감이 약했던 석수마을은 서로를 부역 혐의로 밀고해, 15~22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송호리 갈두마을 주민 6명도 부역 혐의로 경찰에 연행돼 산정리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2일 송지면 어란리 어불도 앞바다에서 수장됐다.
군곡리 방처마을은 송지면에서 피해가 가장 컸다. 수복 후 주민 50여 명이 부역 혐의로 산정창고에 구금되었는데, 이 중 40명이 학살되었다. 앞서 인공 때 지방좌익이 일제강점기에 부면장을 했던 김○○의 모친을 죽였는데 이에 대한 보복 학살로 40여명이 죽음을 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 보고서』)
북한군 점령 시절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우익인사나 그 가족들이 학살되었다면, 법적 심판을 통해 처벌을 하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경찰에 의해 400여 명이 불법적으로 즉결 처형되었다.
송지면은 해남군 전체 상황과 유사하다. 일제강점기에 농민운동을 통해 민족해방을 꿈꾸었던 젊은이들이 해방 후인 1946년 11월 11일 '추수 봉기'에 참여했고, 이들은 '빨갱이'가 돼 전쟁 와중에 갈매기섬에서 집단학살되었다. 또 수복 후에는 '부역혐의'로 2차 학살이 진행되었다. 그 와중에 '인권'은 사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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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섬에 시체가..." 아버지 시신 찾으러 간 열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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