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공존 1층엔 방앗간이 2층엔 초현대식 이발관이 들어섰다.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간판마저 함께 쓴다
이상구
이 골목의 미덕 중 하나는 공존이다. 사오십 년 된 노포(老鋪)와 이제 한두 살짜리 소포(少鋪)들이 사이좋게 함께한다는 점이다. 그 둘은 아무 연결고리도 없다. 노포들은 주로 커튼, 홈패션, 의류 등을 취급한다. 오히려 매우 이질적이다. 낡고 오래된 노포들은 깔끔하고 예쁜 소포들에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꼿꼿하게 허리 펴고 제 자리를 지킨다. 젊은상인들도 노포의 어르신들에게 늘 깍듯하다.
"사실 이런 게 상생이고 윈-윈 아니겠습니까. 우리야 사람 많이 드나들면 좋지요. 우리 매출도 덩달아 오르니까요. 다 죽은 골목을 저 친구들이 살렸으니 대견하기도 하구요. 아무튼 우린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천냥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김흥수 사장은 젊은이들 덕에 지역상권이 더 좋아져 바랄 게 없다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 때부터 여기에 터를 잡았고 자신이 장사한 지는 20년이 넘었다. 이 골목의 산증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그도 요 몇 년 만큼 사람 많이 드나들었던 적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오래 쇠락했던 지역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어르신들하고 한 동네에서 장사하는 게 오히려 좋아요. 배울 점도 많지요. 어르신들도 잘 해주세요. 우리 가게 건물주께서도 4년 간 집세 올리지 않을 테니 열심히 하라며 가게 터를 내주셨어요. 고마울 따름이지요."
카페 워디(WORDY)의 황제윤 사장도 대체로 만족하는 눈치다. 그러면서 자신과 비슷한 나이 대의 다른 사장들도 같은 생각일 거라고 일러준다. 그는 2년 전에 이곳에서 문을 열었다. 지금은 코로나로 손님이 많이 줄긴 했어도 매상도 꾸준하다고 한다. 수입을 물으니 그냥 회사 다니는 친구들 안 부러울 정도라고만 한다. 그는 이 골목이 더 성장할 것이라 내다봤다.
우려했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조짐도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상인들은 대체로 눈에 띌 만큼 가게 세가 오르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 동네에서 8년 째 부동산중개사사무소를 운영 중인 신광식 대표는 앞으로도 터무니없이 가게 세가 오르는 일은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 5년 간 물가 인상 분 정도는 올랐죠. 하지만 미미한 수준이구요, 워낙 세가 쌌던 지역이라 올랐다고 해도 실제로는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죠. 건물주 분들이 대부분 노쇠하신 분이 많아 크게 욕심도 내지 않으세요."
굳이 문제가 있다면 매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개업하려는 젊은이들은 많은데 나오는 가게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돈으로 밀어 붙이거나 억지로 밀어내는 일은 없다. 로얄 부동산 신 대표는 그냥 자연스럽게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또 그런 대로 서서히 변해가는 곳이 이곳 평리단 길의 생리라고 정의했다.
그의 말처럼 건물주들도 대부분 같은 생각이었다. 전에는 아무리 싸게 내 놔도 들어오는 이가 없었는데, 그런 데서 세가 나오니 공돈 같기도 하는 반응마저 있었다.
"몇 푼 더 받으면 뭐 하겠어요. 이렇게 다 죽었던 우리 가게 살려 준 것만도 고마운데, 더 바라면 나쁜 사람이지. 그냥 하던 대로 놔두려 해요. 뭐 여기 터가 좋아 돈 많이 벌어 다른 데 가면, 그 땐 또 모르지만."
이 동네 사는 전영제씨의 말이다. 그의 집은 골목 요지의 3층짜리 건물이다. 조물주 위의 건물주라지만 그는 세입자들에게 박하게 굴지 않는다고 했다. 이른바 착한 건물주다. 다만 먼저 장사하다 나간 사장이 권리금 받는 건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이와 비슷한 지역들이 치솟는 가게 세 때문에 몸살을 앓는 경우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모두를 환영하고, 누구나 존중받는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