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 도선굴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구미 시가지
박도
집안의 대들보
할아버지는 한학과 천문에 조예가 깊었다. 글씨는 언제나 단정하였다. 집안의 대소사 의식, 새로 태어난 아이들 작명을 도맡아 했는데 나의 이름 '박도(朴鍍)'도 할아버지의 작품이다. 음양오행과 하늘의 별자리, 달무리로 일기예보를 했고, 우리 집 마당 한가운데서 빤히 바라보이는 금오산이 명산이라고, 너새니 얼 호손의 '큰 바위 얼굴'에서처럼 이 고장의 인물을 예언하곤 했다.
"저 산기슭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고, 앞으로도 많이 나올 거다."
할아버지는 이따금 산이나 들에서 돌아올 때면 산딸기나 오디(뽕나무 열매)를 칡잎이나 호박잎에 싸와 나에게 말없이 건네주었다. 할아버지는 옛것을 지키겠다고, 꺼져가는 조선의 혼을 이어가겠다고 안간힘을 다하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하지만 해방과 6·25전쟁으로 미군들과 함께 밀물처럼 밀어닥친 양풍의 도도한 물결은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어느 가을 추수를 끝낸 후 햅쌀 한 가마니를 열차로 부치고, 부산 아들집에 가다가 부산역 대화재 후 컴컴한 밤길에 그만 개천에서 실족, 머리를 크게 다쳐 일 년여 고생하다 운명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해 어느 날 학교에 온 적이 있었다. 수업 중인 나를 보고선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 길로 집을 나가신 뒤 1주일 만에 돌아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당시 자유당의 횡포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가 극에 달했다.
그런데도 고향 출신의 자유당 국회의원(김우동 의원)이 국회에서 바른말 한마디 못한 채 여당의 거수기 노릇만 한다고 분개, 상경하여 항의하고 왔다고 했다. 떠나기 직전, 왜 나를 찾으셨을까? 아마도 그날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으로 당신의 장손인 나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왔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해 여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임종이 임박하여 내가 부모님을 모시고자 부산에 다녀올 동안까지 연명했다. 내가 도착하자 곧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대들보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여 이태(두 해) 만에 기왓장까지 내려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