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초기 낙동강 유역의 고달픈 피난민 행렬로 온갖 가재도구를 남자는 지게로 여자들은 머리에 인 채 나르고 있다(1950. 8. 24.)
NARA / 박도
6·25전쟁이 일어나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날 때 나는 여섯 살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인민군들은 쓰나미처럼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해 7월 하순에 인민군은 경상도 진주, 김천, 상주, 함창, 영덕에 이르는 선까지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인민군은 그해 8월 15일 내로 부산까지 밀고 내려간다고 장담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개전 초부터 전황을 사실대로 백성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백성들은 인민군 진주 직전이거나 진주한 이후에야 피란을 떠났다.
구미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1950년 7월 하순 어느 날 북쪽 김천 방면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피란민들의 행렬을 보고, 인민군들이 '쿵쿵' 쏘아대는 대포 소리를 들으면서 허겁지겁 피란봇짐을 쌌다. 첫째, 둘째 고모 네도 이웃에 살았다. 그런데 우리 집에만 소가 있었다. 그래서 세 가구의 피란 큰 짐을 모두 우리 집 소달구지에 실었다.
그 무렵 우리 집은 선산경찰서와 가까운 곳으로, 바로 앞집 건넌방에는 신혼 순경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 순경이 전날 출근한 이후 집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국군을 따라 허겁지겁 남쪽으로 후퇴했다.
홀로 남은 경찰관 부인 성주 댁은 피란봇짐을 이고 징징 울면서 우리 집으로 와서 통사정하기에 할머니가 그를 받아주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 피란행렬은 네 가구로 모두 열다섯 식구였다.
이미 남쪽으로 가는 열차는 모두 끊긴데다가, 신작로에는 피란민으로 가득 찼다. 우리 가족도 어쩔 수 없이 큰 짐은 소달구지에 싣고, 소소한 짐을 남자들은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인 채 낙동강을 건너 남녘으로 피란하고자 약목 쪽으로 갔다. 하지만 낙동강 일대를 지키던 인민군들에게 혼쭐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