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문비뇌문비는 오석에 해서로 적었다. 정조가 채제공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글이다
하주성
그러던 채제공이 1799년 1월 세상을 떠났다. 조선왕조 역대 정승 가운데 그 치적이 가장 두드러진다는 그가 있음으로 하여 남인 시파와 노론 벽파 사이의 균형추가 유지되었는데, 한 축이 무너진 것이다.
"채제공은 팔순의 나이까지 오십 년 이상을 남인 재건에 바쳤고 덕분에 정조는 남인을 기반으로 혁신을 꿈꿀 수 있었다. 그렇듯 채제공은 정조가 꿈꾼 세상을 위한 터잡이 역할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주석 1)
정약용은 스승이자 정치적 후견인이던 채제공의 부음을 곡산 현지에서 듣고 곡을 하면서 「번암 채제공 만사」를 지었다.
1
눈바람 속에서도 걱정스럽던 기유년(1789) 겨울
검은 갖옷 소매 털이 얼어서 부풀었다오
문 안에 들어서면 기상부터 엄숙했는데
임금님 앞에서 처음으로 불평한 마음 열어보이셨소.
세 흉적을 못 베고서 나는 이미 늙었지만
깜깜한 구천에 가도 그들은 용서받기 힘들 겁니다
충의간담(忠義肝膽) 이젠 어느 곳에서 알아줄까
사촉(紗燭)만 휘황하게 늙은 소나물 비춥니다
2
고금에 유례없는 하늘이 낸 호걸이라
우리 나라 사직이 그 큰 도량에 매여 있었소
뭇 백성의 뜻 억지로 막는 일 전혀 없었고
만물을 포용하는 넉넉함이 있었다오
하늘 높이 치솟는 성난 물결도 우뚝 선 지주(砥柱)에 놀라고
땅에 떨어진 요사스런 꽃조차 삼엄한 소나무로 보더이다
영남 영북의 1천여 리에다
사림의 터전 다져 굳건히 쌓아 주었다오.
3
머나먼 외진 곳에 병들어 있는 판에
서울에서 온 소식이 내 넋을 놀라게 했네
교룡(蛟龍)이 갑자기 떠나버리자 구름과 번개도 고요하고
산악이 무너지니 온 세상도 가벼워졌네
100년 가도 이 세상에 그분 기상 없을 테니
이 나라 만백성들 뉘를 기대고 살리요
세 조정을 섬기면서 머리 허얘진 우뚝한 기상
옛일들 생각하니 갓끈엔 눈물이 흠뻑. (주석 2)
채제공을 떠나보낸 정조가 주변이 허전했던지, 그해 4월 정약용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곡산부사로서 의심스러운 살인사건 등을 명쾌하게 처리한 보고서를 살펴보고 형조참의를 맡긴 것이다.
정조가 형조참의를 맡긴 것과 관련 「이암선생 연보」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처음에는 봄 가을을 기다려 불러오려고 했지만, 마침 큰 가뭄이 들어 처리해야 할 여러 옥사를 심리하고자 하여 불렀다. 황해도에서 일어난 의심스러운 옥사를 재조사한 너의 보고서를 보니 그 글이 매우 명백하고 절실하였다. 뜻하지 않게 글귀나 읽는 선비로 옥사를 심리하는 직책을 맡을 만 하므로 바로 불러들인 것이다.
주석
1> 박영규, 앞의 책, 7쪽.
2> 정약용 저, 박석무, 정해렴 편역주, 『다산시정선(상)』, 247~248쪽, 현대실학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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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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