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초상화
서른여섯 살인 1797년 윤 6월에 황해도 곡산 부사에 제수되었다.
한 달 전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어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정조는 반대파의 칼날을 피해 지방관으로 보낸 것이다. 잠시 외직으로 보내어서 공격을 누그러뜨리려는 조처였다.
짧은 기간의 암행어사와 금정찰방을 제외하면 본격적인 지방관, 이른바 목민관(牧民官)이 된 것이다. '목민관'은 임금이나 고을의 원이 백성을 다스리고 기르는 벼슬아치를 일컫는다. 뒷날 치민(治民)에 관한 도리를 논하고, 벼슬아치들의 통폐를 제거하고, 관리의 바른 길을 알리고자 그릇된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쓰게 되는 계기였다.
이때 처음으로 한 고을의 책임을 맡아 피폐한 민생을 목견하고 구제의 방법을 찾았다. 관리들의 탐학이 얼마나 극심한가를 알게되고, 관념적이던 실학사상이 현실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임금께 작별인사를 할 때 정조는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주었다. 「자찬묘지명」이다.
지난 번 상소문은 문장이 좋을 뿐 아니라 생각도 훤하니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이다. 바로 한 번 승진시켜 쓰려고 하였는데, 의논이 들끓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한두 해가 늦어진다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가서 있으면 장차 부를 것이니 서운하게 여기지 말라.
마치 어버이가 자식을 떠나보내면서 하는 당부와 같다. 정약용은 비록 외지로 떠나는 좌천의 벼슬길이지만, 이같은 군주의 마음을 새기면서 낯선 임지로 향한다. 「곡산 부임을 앞두고 궁전을 하직하며」라는 시 한 편을 지었다.
종종걸음 치면서 궁전 뜰 내려설 때
자상하신 임금 말씀에 절로 눈물 흐르네
등생(謄生)처럼 원해서 고을살이 감 아니요
소송(騷頌)의 창주(滄州) 부임과 같다네
떠나는 짐에는 규장각의 책도 있고
궁중 약원의 환약도 있어 이별 시름 덜어 주네
궁궐에서 서쪽으로 삼백 리 가매
가을 되어 서리 내려면 원님 방에서 꿈꾸리.
정약용이 곡산부사로 부임하기 전 이곳에서는 민요에 버금가는 소요사건이 있었다. 조정에까지 알려지고 일부에서는 주동자를 체포하여 처형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과연, 그가 부임하는 길에 이계심(李啓心)이라는 주동자가 백성의 고통을 12조목으로 적어 호소한다며 가마 앞에 엎드렸다. 자수한 것이다. 수종하던 서리들이 포박하러들자 이를 말리면서 관청으로 데려갔다.
사연인 즉 전임 곡산부사 때 서리들이 농간을 부려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자 이계삼이 백성 천여 명을 이끌고 관청에 몰려가 항의한 일이 있었다. 관청에서는 시정책을 찾기보다 주동자의 체포에 나섰고, 이계심은 도망쳤다. 그리고 정약용이 부임한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호소하고자 나타난 것이다.
사실관계를 확인한 정약용은 그를 방면했다.
"한 고을에는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한 사람으로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 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와 같은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이암(倷菴)선생 연보」)
파격적이었다. 조선시대의 관리들은 죄가 있건 없건 필요에 따라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매질을 하여 '자복'을 받아내기 일쑤였다. 특히 백성들의 집단행동은 반역죄로 치부하여 가중처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