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생가정약용 생가
이종원
당대의 '수재'라는 평을 받던 정약용이라도 칠전팔기 끝에 장원급제는 즐겁지 않을 리 없었다. 더욱이 직계 선조로는 5대조 정사윤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한 후 처음의 문과 급제자여서 가문에서도 영광이고 고향 마재마을은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문과에 급제하고 나서」라는 시에서는 정약용의 심경이 읽힌다. 그는 이 시의 '공정과 청렴'을 관직 생활의 모토로 삼는다.
임금 앞에서 보는 시험 몇 차례 응시했다가
마침내 포의 벗는 영광을 얻었네
하늘이 이룩한 조화 깊기도 하여
미물의 생성에 후하게 주었네
둔하고 졸렬해 임무 수행 어렵겠지만
공정과 청렴으로 정성 바치기 원하노라
격려 아끼지 않으신 임금님 말씀
그런데도 어버이 마음 위로되셨네.
스물여덟 살 되는 해 봄에 내과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희릉직장으로 발령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한때 희릉 참봉을 맡은 적이 있었다. 양주군에 있는 중종왕비릉의 관리책임자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더 공부하도록 한직을 배려한 것인지, 이와 함께 그에게는 왕궁 내의 규장각에 다니도록 허락하였다. 규장각은 정조가 설치한 궁중도서관이다. 임금은 능력 있는 학자들을 이곳에 모아 학문연구의 중심으로 삼았다.
비록 한직이지만 그는 향후 12년간 계속되는 관직의 첫 출사여서 감회가 깊었고, 아버지의 발자취가 배인 곳이어서 더욱 뜻이 있었다. 부임 첫날 재각(齋閣)에서 밤을 보내며 시 한 수를 지었다. 「희릉산 재각」이다.
자취 숨김은 진실로 나의 뜻이니
맡은 벼슬이 바로 능직이라네
아침에는 숲으로 창 열고 고요함 익히며
저녁엔 시냇가에 나가 서늘함 맞이하네
안개 걷히자 솔빛이 곱기도 하고
산이 깊어서 풀기운 향기로워라
벼슬 낮아도 부친의 아름다운 발자취 밟으니
하늘 높이 날아 오르기를 연모하지 않으리.
희릉직장의 근무 기간은 짧았다. 이듬 해에 예문관(藝文館)의 검열로 발탁되었다. 예문관은 정부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중요한 문건들을 작성하는 기관이고, 검열은 이 기관의 정9품 관직이다. 오늘에 치면 청와대 공보비서관 수준이다. 직급은 낮았으나 역할은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그래서였을까, 궁내에서 정약용의 취임을 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얼마 뒤 사직한다. 그의 다재다능함을 시기하는 자들이 궁내에 포진하고 있었고, 왕의 총애가 깊어 장래 남인의 거목이 될 것을 우려한 노론측이 일찌감치 톱질을 한 것이다. 정약용이 당한 최초의 시련이다.
조선왕조의 당쟁은 영조에 이어 정조가 탕평책을 펴서 말소를 시도했지만, 그 뿌리가 워낙 깊어서 쉽게 탕평되지 않았다.
당 나라의 당파들은 전후 수 10년간 있었을 뿐이었고 송나라의 당파도 불과 수 대(代)를 내려 가다가 마침내 나라가 망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또 당, 송 때에는 사람마다 누구나가 다 당파는 아니였다. 온 나라 사람이 다 두 패, 세 패, 네 패로 갈리여 2백 년을 내려 오면서 다시는 합하지 아니하고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는 것도 명백히 정론하기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은 우리 나라의 당파이다. 아마도 고금의 당파들 중에서 가장 크며 가장 오래며 옳고 그른 것이 가장 분명치 못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건창, 『당의통략』 원론(原論))
정약용은 어려서부터 당쟁의 폐해를 익히 들었고, 성장해서는 아버지와 장인이 반대파의 모함으로 밀려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생리적으로 당쟁에 휩쓸리는 것을 싫어하고, 하여 예문관의 검열직을 사직하였다.
주석
2> 고미숙, 다산과 연암 라이벌 평전 1탄,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 134~135쪽, 북드라망,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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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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