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중기남양주 정약용트레킹에서 만날 수 있다.
곽동운
정조는 정약용의 화성 축성을 위해 『도서집성(圖書集成)』과 서양의 예수회 선교사가 편찬한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 연구에 도움을 주었다. 정약용은 이같은 자료들을 참고하여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등을 지어 바쳤다. 활차(滑車)와 고륜(鼓輪)이 작은 힘으로 크고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역할을 함으로써 많은 인력과 경비가 절감되었다. 정조는 수원화성이 축성된 후 "다행히 기중기를 이용하여 경비 4만 꿰미가 절약되었다"고 정약용을 치하했다.
정약용은 자신이 마련한 기중기의 설계도에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중총설」의 한 대목이다.
활차를 사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움직이는 것에 두 가지 편리한 점이 있으니, 첫째는 인력을 더는 것이고 둘째는 무거운 물건이 무너지거나 떨어질 위험이 없다는 것이다. 인력을 더는 점에 대해서 논해 보자. 사람이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려면 반드시 힘과 무게가 서로 같아야 비로소 들어올릴 수 있다. 지금의 방법은 단지 한 대의 활차만을 사용하는 것이니, 50근을 들어올릴 수 있는 힘으로 1백근의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다. 이는 절반의 힘으로 전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두 대의 활차를 사용한다면 25근을 들어올릴 수 있는 힘으로 1백근의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는 4분의 1밖에 안되는 힘으로 전체의 무게를 감당해 내는 것이니, 만일 활차가 세 대나 네 대일 경우에 그 힘을 점점 더해주는 것이 모두 이 예와 같은 것이다.
새로운 도르레를 더 설치할 때마다 갑절의 힘이 더 나게 되니, 그 이치가 그러한 것이다. 이제 위아래 여덟 개의 바퀴에서 얻어지는 갑절의 힘이 25배나 되니, 이는 굉장한 것이다. 또 무거운 물건은 무너지고 떨어지는 위험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 논해 보자. 대개 물건의 무게는 같지 않지만 밧줄의 굵기는 한계가 있으니, 일정한 밧줄로 일정하지 않은 물건은 다룬다면 그 형세가 반드시 오래도록 유지될 수 없다. 자칫 잘못하여 손에서 놓치게 되면 그 무거운 물건이 반드시 무너지고 떨어져 다치게 마련이다.
이제 위아래 여덟 개의 바퀴를 사용하는 방법을 쓴다면, 한 개의 밧줄이 여러 번 감겼으나 그 힘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한 가닥의 밧줄로 두 가닥 밧줄 역할을 능히 해낼 수 있다. 따라서 바퀴 여덟 개의 힘이면 수만 근의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고도 오히려 힘이 남게 되니, 어찌 무너지고 덜어질 이치가 있겠는가.
활차를 사용하여 매우 무거운 물건을 움직일 때에는 반드시 녹로가(轆轤架: 오지그릇 만들 때, 발로 돌리며 모형과 균형 등을 잡는 데 쓰는 물레)를 사용하면 그 힘을 갑절로 낼 수 있다. 가령 이곳에 바퀴가 네 개씩 달린 활차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경우에 40근의 힘으로 1천 근이나 되는 무게를 능히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여기에다가 또 녹로가를 더 설치하는데, 녹로의 손잡이의 굵기를 녹로 기둥 직경의 10분의 1의 비례로 만든다면, 40근의 힘으로 2만5천근의 무게를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녹로가가 활차와 함께 서로 힘이 되어야 무거운 물건을 능히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논한 바 갑절의 힘을 낼 수 있다는 비례에 대해서는 모두 별도의 전문적인 설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이상의 방법은 기중기에 관한 것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력을 감소시키는 것은 또한 엄청난 것이다. 만약 크고 작은 바퀴가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방법을 이용한다면 이 세상에 아무리 무거운 물건일지라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나선형 모양으로 돌아가면서 서로 밀어주는 방법일 경우에는 어린애의 한팔의 힘으로도 수만 근의 무거운 물건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 성을 쌓는 데 사용되는 석재는 그다지 크거나 무거운 것들이 아니니, 닭을 잡는데 굳이 소잡는 칼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주석 13)
주석
11> 박석무, 앞의 책, 154쪽.
12> 앞의 책, 123쪽.
13> 고승제, 『다산을 찾아서』, 408~409쪽, 중앙일보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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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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