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남지 전경궁남지 주변으로 넓은 연꽃을 키우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2002년 이후 변화된 풍경이으로, 매년 7월 이곳에서 '서동연꽃축제'를 벌인다. 전북 익산 왕궁리에도 궁남지가 있다는 주장에, 부여군과 익산시가 팽팽한 긴장을 보인적도 있었다. 대결 보다는, 심층적인 연구와 고증이 필요해 보인다.
부여군청
설화 내용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있다. '그의 어머니가 과부이고 궁성 남측 연못가에 살면서, 연못에 사는 용과 통정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 이름이 서동으로 큰 재주와 넓은 도량을 헤아리기 어려웠다(母寡居 築室於京師南池邊 池龍交通而生 小名薯童 器量難測)'는 이야기다.
삼국사기에는 궁남지를 만든 내용이 나온다. '3월에는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였으며, 사방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속에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하였다'는 내용이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과부 어머니에게서 서자로 태어난 백제 왕자가 자기 본래 신분을 모르고 자랐을 개연성이 높다. 마(麻)를 캐서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신라 공주가 무척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는다.
서라벌로 가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혹자는 간자(間者)였다 주장한다. 혹세(惑世)하는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다. 결국 흉한 소문에 시달리던 공주가 귀양을 가고 만다. 서동이 찾아가 간절한 구혼을 한다. 결국 선화공주는 서동과 결혼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서동은 자기가 백제 왕자임을 알게 된다. 짧은 재위기간을 거친 혜왕과 법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 그리고 처가의 나라 신라에 맹공을 펼친다. 나라가 안정되자 궁궐 남쪽에 연못을 만들고, 뱃놀이를 즐겼다. 모모는 이를 방탕한 중국 진시황을 본뜬 행동이라 말하기도 한다.
말년에는 전북 익산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운다. 미륵사를 짓는다. 미륵사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얽힌 사찰이다. 2009년 서탑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선화공주 설화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였을 뿐임이 드러났다. 탑신에서 '사리장엄구'와 함께 출토된 '금제사리봉안기'에서 무왕 후(后)는 백제 귀족 사택(沙宅)씨 딸로 밝혀진 것이다. 여러 말들이 분분하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궁남지는 굉장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만들어진 연못 모양은 밝혀지지 않았다. 무왕은 큰 연못을 파고 자연수로와 인공수로를 잇대어 8km 길이 물길을 만들었다. 못에서 파낸 흙으로 주변 4곳에 큰 언덕을 쌓는다. 언덕 위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한다. 못 한가운데엔 신선들이 산다는 방장선산을 형상화한 섬을 만든다. 연못이 만들어지자 왕과 왕비가 신하들을 데리고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섬에는 정자를 만들었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현지 주민들은 궁남지를 '마래방죽'이라 부른다. 궁남지 규모는 고증사료가 부족해 정확히 추정하긴 어려우나, 현 규모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1965∼1967년에 복원된 궁남지는 당초 규모의 1/3 수준이라 한다. 복원 당시, 섬 안에 건축 흔적과 규모, 섬을 잇는 다리 존재여부에 대한 고증 등등이 미약해 보인다.
일본 조경의 원류가 된 궁남지 조경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