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기관인 사간원 관리들의 모임을 그린 1540년작 ‘성세창 제시 미원계회도(成世昌 題詩 薇垣契會圖)’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은 언로(言路) 확보를 중시한 나라입니다. 하늘 아래 태양과 같은 임금에게도 공개적으로 비판을 개진하도록 사간원(司諫院)이라는 언론기관을 국가의 주요 부처로서 설치 및 작동시켰을 정도입니다. 또한 나라에 재앙이 일어나면 구언(求言)이라 하여, 임금이나 국가가 잘못하고 있는 일을 지적하도록 하고, 그 내용을 채택하여 정책에 반영하도록 했습니다.
이때 관료나 학자와 같은 엘리트층뿐 아니라, 초동목수(樵童牧竪, 땔나무를 하는 아이와 가축을 치는 아이) 곧 배움이 없고 신분이 낮으며 나이가 어린 사람의 말도 경청하는 것이 국가지도자의 덕목이었습니다. 원통하고 억울한 이가 없도록 하는 것, 즉 '민생에 귀 기울이는 정치'가 국정의 기본 방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조선 초기에는 신문고와 같은 제도를 운영했습니다.
우의정(현재의 총리와 유사) 이무가 말하였다. "신문고를 설치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무고로 치는 자도 간혹 있습니다." 영사평부사(재정 담당 관청의 최고위직) 하윤이 말하였다. "신문고 관련 법에서, (민원 내용이) 사실이면 들어주고 허위이면 처벌하며, 절차를 밟지 않고 바로 임금에게 호소하고자 치는 자도 이같이 하는 것입니다... 관리가 백성의 소송을 판결할 때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면 신문고로) 임금께 아뢸까 두려워서 마음을 다해 세밀하게 살핍니다." (태종실록 1년 11월 16일)
태종 재위 1년째인 1401년,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직접 호소하도록 북을 설치합니다. 현재까지도 그 개념이 통용되는 신문고의 시작점입니다. 신문고의 설치를 두고, 태종에게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이 제시됩니다. 우선, 무고 곧 남을 해칠 목적으로 거짓을 꾸며 고소·고발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반하여, 민원이 허위 사실일 경우에는 처벌하면 되며, 백성들이 임금에게 억울함을 호소할까 봐 관리들이 성심껏 판결하므로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니, 신문고의 존재만으로도 유효하다는 것이지요. 태종은 후자에 동의하며 신문고 제도를 시행합니다. 그런데 민원인이 신문고를 치기까지는 여러 산을 넘어야 했습니다.
신문고가 유명무실해질 것을 염려한 세종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려는 자는, 서울은 주무관청에 올리고 지방은 관찰사에게 올린다. 그렇게 한 뒤에도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사헌부에 알리고, 그리하고서도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신문고를 친다. 국가안위 및 불법살인에 관계되는 것 이외에는 아전·노비로서 그의 관원을 고소하는 자, 품계를 지닌 관리·하급관리·평민으로서 그의 관찰사·수령을 고소하는 자는 모두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장 백 대, 노동교화형 3년에 처한다. 타인을 몰래 사주하여 고소장을 내게 한 자도 죄가 역시 이와 같다. 자기의 원통한 일을 호소하는 자는 모두 들어주어 조사하되 무고를 행한 자는 장 백 대, 유배 삼천리에 처한다.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刑典)' '소원(訴冤)')
위와 같이, 호소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여 누구나 바로 신문고를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과 <태종실록> 등에 의하면, 서울 거주자는 담당 공무원에게 지방 거주자는 그 지역의 도지사·군수 등에게 민원을 제기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검찰·감사원에 호소하고, 그럼에도 해결이 안 되면 서울의 의금부(현 공수처)에서 신문고를 지키는 담당자에게 신원조회를 받고 진술서·고소장을 제출한 후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신문고를 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글을 모르는 대부분의 백성·천민보다 사대부 엘리트층에게 이용 기회가 치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의금부에 설치된 신문고를 직접 치기 위해서 지방 거주자는 서울까지 올라와야 하기 때문에 물리적 제약도 있습니다.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거나 신문고를 칠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경우에는 강한 처벌 규정이 있으므로, 이것이 신문고 치기를 기피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민원을 제기하는 긴 과정의 사이사이에는 방해꾼들이 있었겠지요.
순금사(추후 의금부로 변경)에 명하였다. "신문고를 치며 호소하는 자를 막지 말라. (이 명령을) 위반하여 (신문고 치는 자를) 막거나 지체하는 자는 사헌부(지금의 검찰)에서 조사하고, 이를 보고하여 죄를 따져라." (태종실록 6년 11월 8일)
예나 지금이나 민원 처리를 성가시게 여기는 공무원이 있기 마련입니다. 신문고 치는 행위를 방해하는 사람은 처벌하겠다며 임금이 직접 관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원인의 접근은 종종 제지당합니다. 특히 '빽 없고' 신분 낮은 이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당합니다.
개인 소유의 여자종 자재가 광화문의 종을 치며 자기의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므로, 승정원(임금 비서실)에서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의금부의 당직원이 (신문고 치는 것을) 막기 때문에 종을 쳤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이와 같이 금지당한 사람이 반드시 여럿일 터이니, 그 의금부의 당직원을 사헌부(현 검찰)로 넘겨 조사하게 하라." 결국 김중성·유미의 의금부 관직을 파면하였다. (세종실록 10년 5월 24일)
신문고를 지키는 당직자가 접근을 막자 한 천민이 신문고 대신 광화문의 종을 쳤습니다. 그 소리는 경복궁 일대를 울려, 임금의 귀에도 들렸을 테지요. 진상을 듣고 세종은, 이번 한 번만이 아니리라 예상했고, 역시나 조사 결과도 그러했습니다.
부당함을 호소하면 누군가는 들어준다는 사회적 신뢰가 흔들려, 신문고 제도가 유명무실해질 것을 염려한 세종은 담당자를 처벌합니다. 그런가 하면 여론 수렴이라는 당초의 공적 취지에서 벗어나 신문고를 치는 민원인들도 종종 발생합니다.
신문고의 역기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