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에 촬영한 종묘
국립중앙박물관
의금부(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서 아뢰었다. "전에 부사직(종5품 무관)이었던 김용생이 요언을 꾸며 내어 '종묘의 소나무에서 까마귀가 울고, 하늘에서 기후의 변화가 일어나 비가 오고 구름이 시커멓게 끼는 이런 때에는 왕조가 바뀐다'고 하였습니다.
또 병조판서(지금의 국방부 장관) 조말생과 곡산군 연사종에게 원한을 품고 헛소문을 만들어 퍼뜨리기를 '조말생은 나라가 텅 비는 때를 만들기 위해 사람을 시켜 불을 질러서 무기를 태워버렸으며, 연사종은 장군인데도 임금의 행차에 따르지 아니하고 빈 나라에 남아 있으면서 일을 도모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공녕군 이인(세종의 이복동생)과 조말생의 아들인 조선은 가까운 친척이다. 화재가 발생하던 날에 불을 지르며 말을 달려 대궐로 향하여 접전하려 하였다'고 했사오니... 목을 베고 재산을 몰수하소서."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8년 3월 20일)
종묘는 사망한 조선의 모든 임금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므로, 조선의 역사이자 정체성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종묘에서 까마귀가 까악까악 불길한 울음을 울고, 하늘은 음산한 날씨를 보이는데, 이것이 왕조 교체의 조짐이라는 헛소문이 퍼집니다. 이 유언비어의 유포자인 김용생은 과거 군인이었던 인물로, 군부 쿠데타의 조짐이 있다면서 몇몇 인물을 그 중심 세력이라 적시합니다. 그들은 세종보다 연륜이 높은 대신들이었습니다.
그 중 연사종은 조선개국공신이며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공을 세워, 태조 때부터 탄탄대로를 걸어온 거물급 군인입니다. 한 달 전 세종이 군사훈련을 위해 서울을 떠나 있는 사이에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며 그를 무고한 것이지요.
게다가 이즈음 화폐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한양에서 연쇄방화가 일어나 건물이 이천 채 이상 소실되었습니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최대 규모인 화재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했을 시기인데요. 오랫동안 태종의 비서 등 요직을 거쳐 현재 국방부 장관인 조말생과 아들이 화재로 어수선한 틈을 타서, 세종이 없는 궁궐로 진격하려 했다는 소문을 만든 것입니다. 조말생의 아들 조선은 태종의 후궁인 신빈 신씨의 딸과 혼인했으며, 공녕군 이인도 신빈 신씨의 소생이므로, 이 둘은 혼맥으로 엮인 사이입니다.
김용생은 이들이 세종을 몰아내고 왕족인 이인을 임금으로 옹위하려 했다는 뉘앙스마저 섞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와 정치적 맥락, 저격하려는 인물의 내력 등을 고려하여 치밀하게 '소설을 쓴 것'이지요. 이처럼 유언비어는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섞고, 일부 왜곡·증폭하여 설득력과 파괴력을 높이는 법입니다.
난언을 한 조원을 의금부에 가두었다. 당초에 조원이 강음현(현 황해도 금천)의 논밭 소송을 하였는데, 수령이 오랫동안 미루면서 판결하지 않는 것에 분노하여 말했다. "지금 임금이 잘하지 못하여서 이와 같은 수령을 임용했다." (세종실록 6년 4월 4일)
의금부 제조(실무 책임자) 및 삼성(국가 기강을 흔든 죄인을 국문하는 세 관청)에서 보고하였다. "조원이 (임금을) 비방한 까닭을 심문하니 답하기를 '내가 토지 소송을 하여 관청에서 판결하기를 기다리는데, 수령이 손님을 맞아 술을 마시면서 빨리 판결하지 않으므로, 화가 나서 이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다시 묻지 말라. 무지한 백성이 나를 잘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과 같으니, 차마 어찌 죄를 주겠느냐. 빨리 방면하라." (세종실록 6년 4월 17일)
백성에게만큼은 관대했던 임금
세종은 국가공권력에 대한 백성들의 소극적 저항 내지 분노의 표현, 그리고 국가의 기강을 흔드는 악성 유언비어를 구분했습니다. 하소연할 곳 없는 소시민의 원통하고 억울한 마음을 감안해 상황을 해석해야 한다고 본 듯합니다.
수령의 업무 태만으로 토지 소송의 판결이 지체되자 화가 난 백성이, 수령의 임명권자인 임금의 무능을 탓하며 막말을 합니다. 그를 강력하게 처벌하자는 신하들에게 <맹자>(孟子)의 한 구절을 들어, 빠져죽을 줄도 모르고 우물에 들어가려 하는 분별력 없는 어린아이에 백성을 비유하며 무죄를 주장합니다. 자신이 법을 위반한 줄도 모르는 그의 무지를 감안한 것이지요. 발언자가 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지식·권력을 지녔는지 여부를 잣대 삼아, 그 의도성을 판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금부에서 아뢰었다. "이천 사람 전남기가 '지금의 임금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이냐. 서해도(지금의 황해도)에서도 임금을 세울 수 있다'고 말하였으니, 그 난언이 임금께 저촉되고 인간된 도리에 몹시 큰 해악을 끼칩니다. 중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전남기가 관리들이 환곡(흉년·춘궁기에 관에서 곡식을 빈민에게 꾸어주었다가 추수기에 갚게 하는 제도) 바치기를 독촉하여, 생활이 곤란하여 이런 원망하는 말을 하였으니, 무엇이 내게 해로움이 있으리오?"... 신상이 아뢰었다. "고려 말기에 난언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는데, 이를 좇아서 나라가 쇠퇴하였사오니, 마땅히 반면교사로 삼아 법을 분명히 알려서 그 시초를 막으시면 매우 다행이겠나이다"... 임금이 그 말을 좇았으나, 임금의 뜻은 오히려 (전남기를 처벌하지 않고) 살리고자 하였다. - 세종실록 15년 3월 13일
한 백성이 '임금을 갈아치우자'고 난언을 합니다. 진상을 조사해보니, 생계곤란을 호소해도 공무원이 아랑곳하지 않고 대출을 갚으라고 압박하자 홧김에 한 말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한 신용불량자가 '나라 경제 망친 000대통령은 물러가라'고 악다구니를 쓴 셈입니다.
세종은 앞서 본 사례처럼, 원통한 마음을 호소할 곳 없는 소시민의 화풀이이니 무죄 방면하자는 의견을 냅니다. 그에 반해, 오랫동안 예조판서 곧 교육부·외교부·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해온 신상은 고려 말의 예를 들며, 엄벌에 처하자고 주장합니다. 난무한 유언비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민심이 이반했고 결국 나라가 쓰러졌다며 역사적 전거를 들자, 세종은 주장을 굽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는 고려 오백년 역사를 뒤로 하고, 조선이 세워진지 약 사십년 밖에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어쩌면 조선도 패망하고 또 다른 나라로 교체될 수 있다는 불안정성을 인식하고 있는 백성들이 다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권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유언비어에 엄격하게 대처하기로 합니다.
지난 회 기사 <
조선의 신문고, 정권 따라 폐지와 부활 오갔던 이유>(
http://omn.kr/1ofk0)에서 소개한, 전 백성을 대상으로 하여 국가 및 임금에 대한 생산적 비판을 요청하는 구언(求言)과 난언을 명백히 구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