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트럼프가 '넘을 수 없는 선'과 '넘을 수 있는 선' 사이의 공백이 트럼프 시대에 나타날 수 있는 전략적 변화의 최대치다. 주한미군 감축 문제에서도 이 최대치를 벗어나는 조치가 나오기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트럼프도 '넘을 수 없는 선'이라는 것은 미국 세계전략의 중심축이 이미 아시아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중국이 인도양 및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길목을 차단하고자 트럼프가 인도·태평양 전략을 표방하기 이전에, 이미 미국은 그 전략으로 방향을 수정했다. 미국이 글로벌 금융위기로 휘청거린 2008년 중국이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국력을 한껏 과시하며 미국을 맹추격한 데 대한 반작용이었다.
그런 전략 수정의 결과로, 트럼프 전임자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통해 대(對)중국 견제의 비중을 한층 높였다. 2011년부터 가동된 이 전략에는 아시아·태평양 미군의 비중을 높인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여타 지역보다 아시아·태평양에 더 많은 미군을 배치함으로써 중국의 급부상을 견제하겠다는 것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로 중국만큼 미국에 두려움을 준 국가는 없었다. 푸틴의 러시아가 변수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한동안은 중국이 가장 큰 변수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향후 미국이 해외 미군을 감축한다 해도, 여타 지역 미군보다 아시아 미군을 덜 철군하도록 유인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금년 1월 25일자 <미국의 소리>(VOA) 한국어판 기사 '에스퍼, 올해 미군 재배치 시사'는 "에스퍼 장관이 미군 병력 재배치를 통해 아시아에 더 많은 병력을 보내고, 다른 해외 지역에 주둔한 병력은 미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이것 역시 '전 세계 미군을 전반적으로 감축하되, 아시아 미군의 비중을 여타 지역 미군의 비중보다 높인다'는 미국의 방침을 반영하는 것이다.
트럼프가 감축을 추진 중인 주독미군은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중요한 군대다. 주독미군은 유럽 미군 중에서 숫자가 가장 많을 뿐 아니라 전략적 거점도 많이 보유하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인 외교정책연구소(Foreign Policy Research Institute) 홈페이지에 실린 대서양안보 전문가 알렉산더 럭의 6월 29일자 기고문 '주독미군 철수의 의미(The Implication of Withdrawing American Troops from Germany)'에서도 강조된 바와 같이, 오늘날 주독미군은 유럽 미군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미국의 세계전략에도 중요한 존재다.
위 기고문에도 설명됐듯이, 지금 독일에는 유럽 전역 7곳 중에서 5곳의 주요 미군 기지가 배치돼 있다. 또 11개의 전 세계 미군 통합전투사령부 중에서 2곳이 이곳에 있다. 미군 유럽사령부(EUCOM)와 아프리카사령부(AFRICOM)가 독일 남부 슈투트가르트에 주둔하고 있다. 이런 곳에서 미군을 대폭 철군할 생각을 했다는 것은, 아시아 이외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관심이 축소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해외미군의 중심축이 아시아로 이동하는 이 '넘을 수 없는 선'을 트럼프가 임의로 건드릴 수는 없다. 주한미군을 철수하거나 감축하고자 할 때도 트럼프는 이것이 아시아 미군의 전력 증강에 도움이 될지 안 될지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트럼프의 '넘을 수 있는 선'
미군의 축이 아시아로 넘어가는 것이 '넘을 수 없는 선'이라면, 미국의 '세계경찰' 역할을 축소할지 말지는 트럼프가 '넘을 수 있는 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어느 정도의 재량권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세계경찰 역할을 하는 것에 미국인들의 부담이나 피로감이 많이 누적돼 있으므로, 세계경찰 역할의 축소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흐름을 형성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13일 트럼프는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우리는 세계의 경찰이 아니다"며 "미군의 임무는 외국을 재건하는 게 아니라 외국의 적으로부터 우리나라를 강하게 보호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경찰 역할 축소에 미국 사회의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돼 있음을 뜻한다. 트럼프가 외치는 '위대한 미국'이 '세계경찰 역할'과 반드시 병존해야 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계경찰 역할 축소'와 외견상 충돌하는 것 같은 현상이 트럼프 집권기에 두드러지고 있다. 트럼프가 발포하는 대통령 행정명령들이 그 같은 외형상의 상충을 낳고 있다.
올 2월 <일감법학> 제45호에 실린 이현출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문예찬 학생의 공동 논문 '미국 대통령 정책실현 수단으로서의 행정명령: 트럼프 행정부 시기를 중심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이 3년간(2017.1~2019.12) 서명한 행정명령은 137건에 이른다"면서 "오바마 대통령이 같은 기간 동안 108건, 부시 대통령이 126건을 서명한 것과 비교했을 때 높은 수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내용적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행정명령은 미국 국내 정치의 대내적 효과뿐만 아니라 국제정치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대외적 효과까지 포함하고 있다"며 북한·이란·베네수엘라·니카라과·터키·말리 등을 겨냥해 트럼프가 행정명령을 발포한 사례들을 설명했다.
외국 문제를 둘러싼 행정명령이 트럼프 시대에도 많이 나오는 현상을 보노라면, 미국이 세계경찰 역할을 강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트럼프가 말로는 세계경찰 역할의 축소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팽창을 시도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트럼프의 행정명령은 세계경찰 역할의 축소와 충돌하지 않는다. 위의 육군사관학교 연설에서 트럼프는 역할의 축소를 외치면서도 "미국 국민을 위협하는 적에 대해서는 주저 않고 행동하겠다"고 강조했다. 세계경찰 '완장'을 떼내더라도, 미국 안보를 위해서만큼은 적극적으로 싸우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최강대국이 된 뒤로 미국은 전 세계 곳곳에 군대를 배치하고 이를 통해 외교적·경제적·군사적 목표를 추구했다. 이로 인해 지구촌 여기저기에 미국의 이해관계가 산재해 있기 때문에, 세계경찰 역할을 축소한다 해도 곳곳에 널려 있는 자국의 이익을 지키는 노력을 동시에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북한·이란·베네수엘라·니카라과·터키 등에 계속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세계경찰 역할을 확대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세계경찰 역할로부터 순조롭게 이탈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주한미군 감축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