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취푸시와 안양시 간의 이동 시간.
구글 지도
<서경> '반경'편은 "대가와 세족들은 기존 땅을 편하게 생각하고 천도를 어렵게 여겨서 근거 없는 말로 선동했으며, 소민들은 서로 분산돼 흩어져 살면서도 이해관계에 미혹돼 거주지를 옮기려 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이때 반경이 선택한 방법은 설득될 때까지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 같은 힘겨운 설득 작업 끝에 반경은 결국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천도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은허와 함께 기억되는 은나라의 번영은 반경의 이런 노력 이후 전개됐다.
이렇게 어려운 일이 천도다 보니, 꼼수를 쓰는 군주도 나타났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합의 도출이 어려울 것처럼 판단되자, 너무나 엉뚱한 수를 생각해낸 것.
고구려 장수태왕(태왕이 정식 명칭)이 서진정책(중국 진출 정책)을 포기하고 남진정책(백제·신라·가야 공략정책)으로 선회하도록 만든 나라가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221~589년)의 북중국 강국이자 유목민 출신인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다. 이 나라의 영웅적 군주로 기억되는 효문제가 그 꼼수의 주인공이다.
꼼수 천도
북위 건국 85년 뒤인 471년에 즉위한 효문제는 중국 대륙 역사에 길이 남을 문화개혁에 착수했다. 유목민을 북중국에 정착시키는 한편, 한족 피지배층과 융화시키는 작업을 단행했다. 이를 위해 그가 추진한 과제 중 하나가 도읍지 이전이었다.
지금의 베이징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250km인 북위 수도 평성(平城)은 유목민의 냄새가 풍기는 곳이었다. 효문제는 이곳을 떠나 뤄양(낙양)으로 가고자 했다. 뤄양은 농경문화의 중심지이자 중국 한족의 전통적인 도읍이었다. 평성은 평안도 신의주와 위도가 비슷하고, 뤄양은 전라도 진도와 위도가 비슷하다. 효문제는 장거리 천도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선비족 지배층은 효문제가 천도하려는 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이들은 황제의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이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천도가 실현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효문제가 생각해낸 꼼수가 있다. 이것은 고 이공범 성균관대 교수가 쓴 <위진남북조사>에 아래와 같이 소개돼 있다.
"효문제 시기에 평성은 보수화한 선비족 상층부의 세력 기반이었기 때문에, 낙양 천도는 이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게 됐다. 황제는 태화 17년(493), 남제 친정을 명목으로 대군을 거느리고 남하해, 낙양에 이르러 다시 남진하려고 했으나 군신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남정(南征) 중지의 교환 조건의 모양새를 갖춰서 낙양 천도를 선언했다."
유목민 지배층이 뤄양 천도를 반대하자 남중국 왕조인 남제를 공격하겠다며 대군을 거느리고 남하한 뒤, 추가적인 군사행동을 벌이지 않는 조건으로 뤄양 천도에 대한 동의를 받아냈던 것이다. 외국 침공을 명분으로 도읍 예정지에 대군을 주둔시킨 뒤 그곳에 눌러앉는 방법을 구사한 것이다. '천도 할래, 전쟁 할래?'라며 기득권층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했던 셈이다.
이런 식의 꼼수까지 등장할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이 천도였다. 그 때문에 옛날 군주들은 수도를 옮기기 전에 하늘의 뜻을 묻는 모양새를 취했다. 수도 이전의 명분을 하늘에서 찾고, 이를 기반으로 설득 작업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서였다. 주나라 행정체계를 기록한 <주례> '춘관종백'(春官宗伯) 편에서는, 천도를 하거나 군대를 동원할 때 거북점을 쳤던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
유사한 풍경은 한국사에서도 나타난다. 태조 이성계 역시 한양 천도 과정에서 하늘의 뜻을 묻는 모습을 연출했다. 음력으로 태조 3년 8월 12일 자(양력 1394년 9월 7일자) <태조실록>에 따르면, 재상들이 천도를 반대하자 이성계는 개경 소격전에서 하늘의 뜻을 묻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성계는 결국 한양 천도를 관철시켰다.
기득권 반발에 가로막힌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