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김지은입니다> 겉표지
봄알람
읽어나가기 힘들지 않을까 두려웠던 이 책은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비서 노동에 대한 르포르타주면서, 386 운동권의 권위주의와 '의장 옹립 문화'에 대한 차분한 탐사보도였고, 여러 국면에서 다르게 선택하는 입체적인 인물들이 나오는 서사물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내게는 박원순이 던져두고 떠난 현재의 혼란을 설명할 수 있는 지침서처럼 보였다.
읽어나가면서 '안희정'의 기표는 하나지만 기의는 최소 세 가지인데 이를 섞어 씀으로써 오해가 생김을 알게 되었다. 우선 자연인, 한 개인으로서의 '안희정'을 '안희정 개인'이라 하자. 또 안희정이 말해오던 민주주의와 인권과 소통 등, 가치와 비전으로서의 안희정이 있다. 이를 '안희정 정신'이라 하자. 마지막으로 안희정계, 라인, 사단, 패거리 등으로 부를 수 있는, 이익 또는 가치를 함께 하는 안희정 사람들을 편의상 '안희정측'이라고 부르겠다.
1. 비서 노동의 특수한 후진성
'안희정 정신'에 동의하여 그와 함께 일하게 된 사람들 중에 <김지은입니다>의 저자 김지은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전한 수행비서의 노동 현실은 충격적이었다.
비서 업무 매뉴얼 중 형용모순적인 '민주주의 지도자 보필'의 세부 항목이 다음과 같다. '내 몸의 방패화', '악역 맡기', '시키기 쉬운 부하 되기', '좋은 것은 리더 먼저', '항상 리더 편', '철저히 리더만을 위한 판단', '아프지 않기', '개인 약속 지양', '겸손, 인내, 희생', '비밀 엄수(입, 눈, 귀)' 등등.
안희정이 말하던 인권도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저자는 늘 주당 130시간을 넘겨서 일했고 140시간 넘겨 일하기도 했다. 안희정은 거의 모든 전화를 착신전환해두어, 수행비서는 이를 한밤중, 휴가, 샤워 중에도 늘 받아야 했다. 아침에는 안희정이 신을 신발 두 짝 사이의 거리와 각도를 정확하게 맞춰놓고 기다렸고, 밤에는 안희정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 내일 일정을 점검했다.
이만큼 혹독하지 않더라도 업무와 일상이 분리되지 않고 분신처럼 살아야 하는 비서들은 대체로 성폭력 피해를 입기 쉬운 취약한 조건에 놓여 있다. 본인의 피해를 증언하는 것이 곧 '불충'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털어놓기도 어렵다. 젊고 '예쁜' 여성을 비서로 발탁하는 전 사회의 관행 역시 철폐해야 한다.
2. 위력에 의한 성폭력
안희정은 "너는 직언하지 말고 모두가 NO할 때 YES해야 한다", "너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고, 내 그림자다. 나는 눈으로 얘기한다. 너는 나를 지켜야 한다" 같은 말을 비서에게 반복했다.
표현의 자유, 평등권, 프라이버시, 자기결정권 등 여러 기본권이 무시당했다. 김지은은 '순장조'라고 불렸다. 왕의 비밀을 알고 함구하다 왕과 함께 무덤에 묻히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김지은은 충남경찰청장과 지역 검사장들,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 대통령과 수시로 만나고 연락하는 안희정을 24시간 수행하며 그의 거대권력을 실감한다. 반면 충남도청의 성고충 전담 직원은 6급 주무관이었다.
대체 누구에게 피해를 신고할 수 있었을까? 전임 수행비서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더니 "네가 조심하라"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보안을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하며 고소했지만 '안희정측'에 실시간으로 고소 사실이 전달되었다.
박원순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서울시청의 피해자 A씨도 피해 사실을 토로했더니 비서실에서는 묵살했다는 의혹이 있고, 피해자 지원단체에 따르면 경찰에 고소하던 날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서 곧바로 피소인에게 고소 사실이 전달되었다고 한다. 위력은 다각도로 조직적으로 실행된다.
3. 미투 운동에도 지속되는 성폭력
안희정은 미투운동이 공론화된 후 김지은을 불러서 미투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낸 뒤, 그 입막음의 수단으로 다시 성폭행한다. 가해자로서 미투가 두려웠다면, 자신의 피해자에게 최대한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다시는 폭력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대응이 아닐까?
오거돈 전 부산시장은 2019년에 불거진 미투 의혹을 무마하고 지나간 뒤 2020년에 성추행을 저지른다. 2002년 성추행을 저지른 우근민 전 제주도지사도 성추행 피해자가 사과를 요구하는 면담 자리에서 다시 성추행을 저질렀다. 박원순은 2002년 당시 '우근민 제주도지사 성추행사건 민간진상조사위원회'에서 민간 진상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2018년에 안희정이 사퇴하는 모습도 지켜봤다. 그런데도 피해자 측에 따르면 부서 이동을 한 올 2월에도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에 초대했다고 했다.
가진 것도 잃을 것도 많은 지자체장들은 다른 권력자가 성폭력 가해 사실이 밝혀져 낙마하는 모습에 경각심을 가질 만한데 이후에도 가해를 지속했다. 권력이 주는 도취감 때문일지, 특권의식으로 방만해지는 현상(밧세바 증후군) 때문일지, 상명하복이 미덕이라는 공무원 조직의 특성 때문인지, 분명한 진상 조사와 권력구조 연구가 필요하다.
4. 2차 가해와 자살, 그 두 극단을 넘어
안희정의 세 가지 기의의 움직임이 서로 어긋나는 순간이 관찰된다. 예를 들면 '안희정측'이 죄다 모여 앉아 피해자에 대한 음해를 수집하고 있던 그 순간에 '안희정 개인'은 다른 장소에서 '용서를 구한다.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이다'라는 글을 올리고 있었다. '안희정 개인'이 '안희정 정신'에 따른 죄책감을 느끼고 독자행동을 잠깐이나마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안희정측'은 '안희정 개인'의 독자행동을 곧바로 무마하고 다시 '개인'을 '측'으로 재흡수했다. 안희정이라는 거대한 상징자본은 이미 그 자체의 관성 때문에 '개인'과는 무관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해를 전면 부정하고 피해자에게 2차 가해하는 가해자, 죽음을 택하여 다시 피해자에게 크나큰 죄책감을 안기고 진실을 묻어버리는 가해자, 이러한 두 가지 극단 말고 다른 공간이 가능해야 한다(오거돈의 경우, 사과하고 사퇴하는 해결책을 따랐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죄지은 만큼 다시 벌을 받고 나서 할 일이 남아 있다면 다시 하는 가해자의 모습을 보았으면 한다. 죽음으로 도피해도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고 가족은 고통스러워하며 측근들은 해고될 때, '죽음이 답이 아니구나. 차라리 살아남아서 해명하고 변호하자'라는 메시지가 정치권에 남을 수 있다.
5. 2차 가해의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