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령포서강이 굽이도는 강 건너편 육지 속 섬 청령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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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 섶다리에 대한 유래가 특이하다. 숙종24년(1698년) 11월 6일자 실록에 '노산군을 단종으로 묘호는 장릉(莊陵)으로, 그의 비(妃)는 정순(定順)으로 묘호는 사릉(思陵)이라 정하여, 시호(諡號)를 추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노산군을 왕으로 복권시킨 것이다.
1698년이 지나가기 전에, 단종과 정순왕후의 위패를 종묘 등에 안치시키는 일을 마무리한다. 약 250년 만에 왕의 지위를 되찾은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699년, 수차례에 걸쳐 장릉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수리한다. 윤7월 23일에서야 가까스로 능 수리를 마쳤다고 숙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곤 강원 관찰사에게 장릉에 참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관찰사는 여러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영월 인심은 그동안 한양과 권력에 대해선,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모두 단종의 죽음에 대한 반발심이었다. 복권된 단종의 제사만이라도 성대하게 치러내야 민심이 조금이나마 달래질 것 같았다.
이에 관찰사는 갖은 제수용품을 바리바리 준비해 우마차에 싣고, 원주를 떠나 청령포로 향한다. 길은 험한 산길에 구불구불 물길이다. 장릉을 60여리 남겨두고 주천강에서 외 섶다리를 만난다. 섶다리는 낡아 있고 백성들은 냉담하기만 하다. 처지가 난감하다. 하지만 이내, 단종에게 제향(祭享)하는 관찰사 행렬임을 알아보고, 발 벗고 나서준다. 외 섶다리로는 수레 등이 지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천리와 신일리 백성들이 각각 하나씩 섶다리를 새로 만든다. 쌍으로 된 섶다리가 놓여진다. 우마차도 지나다닐 정도의 넉넉한 인심이 배어 나온다. 백성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참배를 마치게 된다. 관찰사는 순박한 백성들의 마음이 고맙기만 하다. 원주로 돌아가는 길에, 쌍 섶다리를 놓아 준 백성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곡식을 나누고 따뜻한 위로잔치를 열어준다. 이때부터 쌍 섶다리가 주천강의 상징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