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한 상점에 긴급재난지원금 사용 가능 안내문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엄마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이 분명했는데, 저녁상을 물리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코로나19 감염 확산 이후 '코로나 블루'를 겪었던 엄마는 요즘 들어 다시 활력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세 달만에 미장원에 가서 머리도 자르고 염색도 했다. 코로나 이전의 엄마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듯했다. 외모는 물론이고 기분이나 정서까지도.
엄마의 그 의미심장한 표정의 비밀은 저녁상을 물리고 소파에 앉아서야 풀렸다.
"네 동생 일 나간단다."
이건 분명 우리 모두에게 희소식임에 틀림없다.
"잘됐네요. 어디로?"
"아르바이트이긴 한데… 직접 물어봐."
엄마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엄마, 그렇게 좋아?"
"좋지~"
엄마의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몇 달째 일을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는 동생을 보면서 엄마는 말은 안 했지만 속이 답답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잘 발음도 잘 안 되는 아르바이트란 단어까지 써가며 달뜬 표정으로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가게는 어디에 있는데?"
"몰라. 그건 동생한테 물어봐."
엄마에게 '동생이 다시 일을 나간다'는 사실 말고 나머지는 모두 자잘한 사항에 불과해 보였다.
내 동생은 망한 자영업자입니다
동생은 10년 전 가게를 열었다. 개업한 곳은 내가 사는 도시에서 비교적 번화가였다. 20년 동안 남의 가게에서 일하던 동생의 첫 번째 가게였고, 가게는 그런 대로 잘 굴러갔다. 남의 가게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했다. 가끔 매장에 들르면 심심찮게 손님이 들어왔다. 동생의 점포는 자리를 잡아갔고, 동생도 어엿한 사장님이 되어갔다.
그런데 지난 2~3년 전부터 경기가 너무 나쁘다는 소리가 들려왔고, 설상가상으로 동생 가게 주변 상권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저쪽 동네와 이쪽 동네 상권을 구분해 주던 굴다리가 허물어지면서 상권은 하나로 통합됐고, 대규모 마트를 비롯한 동생과 동일한 업종의 매장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새로 생긴 상권으로 몰렸고 동생이 속한 옛날 상권은 퇴락하기 시작했다. 그 지역에서 잘 되는 상점은 떡볶이와 어묵 같은 저렴한 길거리 음식을 파는 곳뿐이었다. 새로 문을 연 대형 점포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세일과 졸업 기념 무상 증정 이벤트를 이어갔다.
혼자 소규모로 운영하는 동생의 점포가 그런 대규모 매장과 경쟁에서 밀리는 것은 당연했다. 동생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고 생전 하지 않던 '힘들다'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기 시작했다.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했고 안 하던 혼술도 가끔 했다. 그렇게 1~2년을 버티다 동생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손해를 보고 매장을 처분했다. 동생의 매장 자리에는 어묵집이 들어왔다. 어쩌다 발걸음을 해보면 어묵집은 언제나 인산인해였다. 솔직히 기분은 별로였다. '동생 가게가 저랬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배도 좀 아팠다.
그래도 동생의 마음은 편해 보였다. '그동안 안 되는 가게를 붙들고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으면…' 하는 생각에 짠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런 마음이었으니 엄마 마음은 어땠을지 말해 무엇하랴.
매장을 정리한 동생은 한동안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난해 봄에 서너 달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간 후로 지금까지 그냥 집에 있었다. 불경기에 나이 든, 경력이 많은, 게다가 사장까지 했던 동생을 불러주는 곳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본인보다 엄마가 더 초조해 했다. 물론 엄마가 그런 내색을 할 리 만무했지만 어쩌다 나오는 한두 마디의 염려 속에는 엄마의 속내가 모두 담겨 있었다.
그러다 이번 일자리가 들어온 것이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비록 단기 아르바이트 자리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