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사직터널이 개통했을 때의 모습.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을 비롯한 관계자와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통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서울특별시
사직터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도로가 없었다. 그래서 독립문에서 사직단을 잇는 도로를 여는 게 우선이었다. 가장 먼저 사직단 대문을 뒤로 밀고 그 다음 가옥 100여 채와 내자시장을 철거했다. 심지어 원래 계획에는 당시 고급 아파트였던 내자아파트도 철거하려다가 반발 끝에 취소되는 촌극도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당시 태백선 공사를 맡았던 한강공영이 도로의 공사를 맡았다. 150m가 안 되는 쌍굴 터널을 뚫는데 당시로써는 비싼 공사비였던 9천5백만 원, 현재 물가로는 30억 원에 육박하는 비용이 들었다. 터널 바로 위에 사람이 사는 집이 있어, 가옥을 보호하면서 터널을 시공해야 하는 난공사가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 공사 끝에 1967년 1월 21일 김현옥 시장이 직접 참여한 가운데 성대한 개통식이 열렸다. 서울에서 첫 번째로 기차를 타지 않고도 지나갈 수 있는 터널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차량 통행이 많은 서대문네거리 대신 사직터널을 타면 금세 서울 광화문 앞까지 닿을 수 있게 되어 호응이 컸다.
사직터널의 성공적인 개통에 이어 서울 곳곳에는 여러 터널이 지어졌다. 서울의 복판을 관통하는 남산1호터널이 1970년 개통했고, 1971년에는 정부 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북악터널이 성대하게 개통식을 열고 남산2호터널이 개통하는 등 고갯길을 넘어 터널로 이어지는 서울의 산지 극복이 본격화됐다.
사직터널의 중요성도 커졌다. 서울 서쪽의 개발이 진척되자 1979년에는 서대문구 봉원동에서 독립문으로 이어지는 금화터널이 개통되고, 금화터널과 사직터널을 하늘 위에서 잇는 독립문고가차도가 개통되며, 1980년 개통된 성산대교에서 동대문까지 이어지는 서울의 또 다른 간선로가 만들어졌다.
그러니 1967년 기준에는 '오버스펙' 이야기를 들었던 왕복 4차선의 쌍굴 터널로는 한강 너머에서 쏟아지는 막대한 교통량을 버티기 어려웠다. 그래서 독립문고가의 개통에 맞춰 기존 터널 바로 옆에 160m 길이의 새 터널을 개통했다. 터널 세 개가 한곳에 겹쳐 있는 사직터널의 이색적인 모습은 이때 만들어졌다.
터널이 남긴 60년대, 그리고 서울 개발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