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촬영 피해자 A씨.
소중한
성욕≠성범죄 욕망
이러한 항소이유서와 마주한 피해자는 억울함에 가슴을 칩니다. 기자와 만난 피해자는 "피고인 측이 주장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내용이 항소이유서에 담겨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불쾌하다"고 말했습니다. "왜 꼭 성범죄가 일어나면 '여자가 문란하네', '여자가 꽃뱀이네' 이런 식의 이야기가 오가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성범죄에 있어서 피해자를 탓하는 문화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최근 공분을 산 '텔레그램 대화방 성착취 사건(이른바 n번방 사건)'을 두고도 '피해자 탓'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SNS에서 '일탈계' 운영하던 이들 중 여러 명이 성착취 피해자로 확인됐는데, 곳곳에서 '피해자들도 당할 만했다'는 식의 반응이 나오고 있는 겁니다.
일탈계는 익명의 운영자가 자신의 몸을 찍어 SNS에 올리는 '일탈 계정'을 의미합니다. 조주빈 등 n번방 사건의 핵심 피의자들은 이들에게 접근해 신상정보를 알아낸 뒤, 이후 '주변에 알리겠다'고 협박해 성착취를 일삼았습니다.
테이블에 휴대폰을 올려둔 제가 소매치기를 당해도 싼 사람이 아니듯, 일탈계를 운영한 피해자들 역시 성범죄를 당해도 싼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전자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해도, 후자는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 보입니다. 이에 일침을 가하는 한 현직 판사의 말입니다.
"성범죄는 실수도 아니고, 성욕의 발현도 아닙니다. 성욕이 성범죄 욕망과 동일시 돼서도 안 됩니다. 성범죄는 타인을 억압하는 폭력입니다. 때문에 피해자로 인해 성범죄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인식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정조의 망령
형법 32장의 명칭은 '강간과 추행의 죄'입니다. 그런데 25년 전만 해도 지금과 달랐습니다. 1995년 개정되기 전까지 형법 32장의 명칭은 '정조에 관한 죄'였습니다. 국어사전에 나온 정조의 뜻은 '여자의 곧은 절개'입니다.
죄의 명칭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정조의 문화'에 갇혀 있는 듯합니다. 현행법상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폭행 또는 협박'이 전제돼야 하는데, 이를 판단하기 위해 '피해자가 얼마나 강하게 저항했는지'를 고려하곤 합니다. '정조를 깨뜨리는 것'을 처벌해왔기 때문에 여성이 '곧은 절개'를 증명해야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겁니다. 이는 성범죄를 당해도 되는 사람과 당해선 안 되는 사람을 구분하는 행위입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상담 내역을 보면 "경찰이 '27살이나 된, 직장 잘 다니던 여자가 어떻게 강간을 당하냐, 꼬신 거 아니냐'라고 조롱했어요", "검사가 진술서를 써오라고 해서 검찰에 갔더니 '속옷을 입었습니까, 안 입었습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했어요" 등의 내용이 수두룩합니다. 법원도 이에 뒤지지 않습니다. 2018년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어느 판사의 발언은 사뭇 놀랍습니다. 심지어 그는 성폭력전담재판부 판사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여성이 술을 마시고 성관계를 맺는 게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다." - 2016년 8월 18일 서울서부지방법원 판사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자신의 논문 <성폭력 2차 피해를 통해 본 피해자 권리>(2012)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정조에 관한 죄'의 망령"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의 1심 재판부가 피해자에게 '정조'를 거론한 것이 폭로돼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두 법안, 그리고 상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