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
시대의 굴곡을 겪으면 굴절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경국의 이데올로기로 해서 500년 왕조를 유지하였다. 성리학을 압축하면 충(忠)과 효(孝)이다. 우리말로 바꾸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한다는 뜻이다. 이같은 가치는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겪으면서 증발되고 말았다.
왕족과 유학자이기도 한 대신ㆍ중신들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전국의 내노라 하는 서당의 유생 700여 명 역시 일제로부터 적지않은 은사금을 챙겼다. 매천 황현을 비롯하여 몇 명의 선비들이 순국하여 그나마 성리학의 맥이 유지되었다고 할까.
따지고 보면 애꿎은 성리학에 책임을 물을 순 없을 것이다. 조선조 선비들이 성리학에만 매몰되어 성리학은 일종의 근본주의가 되고 선비들이 교조화한 데 보다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망국의 쓰나미에도 선비의 숨결은 남아 있었다. 진정한 유학도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굴절하지 않는 선비정신에 있다. 주시경을 '선비'라 부르기는 잘 어울리지 않는 대목도 있다.
그의 개혁성과 진보성향, 무엇보다 '한자시대의 선비상'과는 걸맞지 않는 한글연구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참선비' 임에는 틀림이 없다. 선비가 별것인가, 진정한 '선비정신'을 구현하는 사람이면 선비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개국 이래 최초의 국치를 현실로 맞은 주시경은 참담한 심경으로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더러는 폐쇄되기도 했으나 아직 병탄 초기라 남아 있는 학교와 학당도 적지 않았다. 신학문을 갈망하고 우리 말과 우리 글을 배우려는 학생들의 열기도 뜨거웠다.
교실에는 어느 시간이든지 거의 빈틈이 없을 만큼 학도들이 들어앉아 주 선생의 강의를 듣는다. 한눈을 팔거나, 하품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는 따위야 이 교실에서는 애초부터 볼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들리는 것은 선생의 다정스러운 말소리나 예서제서 삭삭이는 연필소리 뿐이다.
좀 갸름한 듯하고 넓으신 선생의 얼굴에는 언제든지 엄숙은 하시면서도 보드랍고 살가운 빛이 은은히 나타난다. 선생이 웃으시는 것도 별로 볼 수 없으려니와 또한 선생이 성내시는 것도 볼 수 없다. 그리고 선생의 눈에는 애정이 넘치는 듯하며, 그 푸대하신 몸피며, 엄전하신 풍채가 모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경복하는 마음을 나게 한다. 선생의 말씀은 웅변은 아니다.
눌변도 아니다. 어느 때 어느 문제를 가지고 말씀을 하시든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염증이 아니 나게 하고, 늘 떳떳하게 진실하게 느끼게 한다. 그리하여 선생의 말씀에도 선생의 성격이나 행동이 곧잘 보인다. 과연 선생은 인격 그것으로도 그 때 제일인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당시의 학생이었던 이병기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주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