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만주군관학교 옆 나라툰소학교 정문. 가까운 곳에 옛 만주군관학교가 있었다(2000. 8. 22.)
박도
만주군관학교
하지만 그 무렵 내게 박정희는 그리고 싶은 작품의 주인공으로, 고향 출신이라는 데 어떤 친밀감을 느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작가들은 당신의 어린 시절과 고향 이야기를 평생토록 작품의 제재로 삼고 있다. 독일의 헤세는 고향 칼브를 <데미안> 등 여러 작품에서 그렸다. 또 영국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도 고향 호워드의 황야에 살면서 불후의 명작 <폭풍의 언덕>을 남겼다.
우리나라의 현기영, 김원일, 박완서 등의 작가들도 당신들의 고향 풍물과 어린 시절에 고향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뒷날 명작으로 남겼다. 그래서 나도 습작기인 고교시절에는 고향 이야기에 더불어 박정희란 인물을 그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아버지는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글은 함부로 쓰지 않는다는 충고를 하셨다.
그러면서 그 무렵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그분의 얘기를 들려주셨을 때 큰 충격에 빠진 채 지냈다. 그런 가운데 1999년 8월 4일, 나는 중국대륙 항일유적지 답사로 헤이룽장성 하얼빈의 동북열사기념관에서 고향 출신의 한 항일명장을 만났다.
그분은 박정희가 태어난 상모동 철길 건너 이웃 마을로 왕산 허위의 당질(사촌 형의 아들)인 허형식(1909~1942) 장군이었다.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쁨이란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의 그것과 같았다. 황홀경에 빠졌다.
그래서 나는 그 이듬해인 2000년 8월 17일 서울을 떠나 하얼빈에 도착한 다음 허형식 열사가 살았던 빈안진 일대와 최후 희생지인 경안현 대라진 청송령 들머리 허형식 희생지에 가서 '들꽃'을 바치면서 묵념을 드렸다. 그런 다음 그 길로 창춘에 있는 상모동 출신 박정희 청년이 청운의 꿈을 품고 찾아간 만주군관학교로 갔다.
역사에서 가정은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독립군 출신이었더라면 우리 현대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만주군 중위였다는 사실은 생전에도 사후에도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 점이 민족정기 면에서 크나큰 흠으로써 평생을, 아니 사후에도 두고두고 비판받고 있다.
사실 만주군관학교 출신은 그분뿐이 아니다. 우리 국군 창군 주요 인물과 현대사를 주름잡았던 인물 중에 만주군관학교 출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정일권, 백선엽, 원용덕, 김백일, 김일환, 장은산, 이한림, 김동하, 이주일 등등.
이들은 그 어떤 변명을 늘어놓을지 모르지만, 만주군관학교 지원 당시 일제의 선전 문구 '왕도낙토(王道樂土)'니, '오족협화(五族協和)'니 '일만일여(日滿一如)' 따위의 말에 속아서, 또는 집안이 가난하여, 아니면 국권을 잃은 조국보다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학교에 발을 들였을 것이다.
나는 혼자 수륙만리 헤이룽장성 경성현 대라진 마을의 허형식 장군 희생지와 창춘 교외의 옛 만주군관학교를 찾아갔다. 이는 동시대, 같은 고장 두 젊은이의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 자취를 추적해 보겠다는 동향 작가로서의 도리요, 집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