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 투표 후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윤보선 후보.
국가기록원
박정희와 악연
1971년 10월, 박정희의 유신 선포로 나라 전체가 겨울공화국이었다. 서슬 퍼런 유신 체제 하 윤보선은 민주화운동에 앞장서서 눈물겨운 투쟁을 벌였다. 1973년에는 정구영, 지학순 등과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했고, 1974년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기소되기도 했다.
그해 7월에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탄원서에 서명도 했고,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민주화 투쟁을 벌이다가 1979년 10.26 사태를 맞았다. 하지만 5공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윤보선은 국정자문위원을 맡았다. 그는 군사정권과 전에 없던 우호관계로 전두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뿐 아니라, 1987년 대선에선 노태우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러한 윤보선의 행보는 당시 야당과 학생들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배우자와 자녀들조차도 그에게 제발 나서지 말라고 만류했다고 전해진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의 말년을 보라고 했는데, 그의 말년 행적은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그런 그에게도 죽음은 비켜가지 않았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1990년 7월 18일 안국동 자택에서 94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다른 대통령과는 달리 국립묘지에 모셔지지 않고 충남 아산 선산에 안장됐다고 한다.
사실 사람으로 태어나 죽어서 국립묘지에 묻힌다는 것은 최대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윤보선은 그런 혜택을 사양한 채 선산으로 갔다. 그곳으로 모신 이유는 명당이라는 이른바 풍수지리설 때문이요, 또 다른 하나는 박정희와 같은 곳에 묻히기 싫어서 그랬다는 소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