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들라마 '녹두꽃' 한 장면죽창을 들고 진군하는 동학농민군
추준우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이를 지켜보면서 일기를 쓴 사람이 있었다. 다음은 이 '일기'에 나타난 당시의 상황과 농민군 · 관군의 행패에 대한 기록이다.
7월 14일
동네 여러 사람과 같이 민간 보루(民間堡壘)를 구경하다.
한 달 동안에 인심세태(人心世態)가 전일과 크게 달라져 관아(官衙) 안에서 잡기(雜技)가 어지러이 일어나도 목사가 막지를 못한다. 성내에는 동학무리가 1천여 명이나 있는데 그들이 성명하기를, 앞으로 왜놈이 도처에 가득 찰 것이라고 하여 이 근처에는 동네마다 곳곳에 보루를 쌓고 있으며, 이 동네에도 북산(北山) 위에 보루를 쌓았다고 한다. 그 산은 높고 험준하여 한 사람이 창을 메고 있으면 만 명이 당할 수 없다고 한다.
처음에 임금이 초토사 홍계훈을 전주에 보내어 동학을 치게 하였다. 초토사가 동학군 속에 몰래 세작(細作)을 보냈는데 동학 우두머리가 갑자기 명령을 내려 모든 군사들이 황건(黃巾)을 쓰도록 하였다. 그러자 모두 황건을 썼는데 세작은 황건이 없어 쓰지 못했다. 우두머리가 말하기를 "너의 주장(主將)에게 가서 다시는 간사한 꾀를 쓰지 말라고 하라." 하였다.
그뒤 초토사가 세작에게 황건을 주어 다시 보냈다. 우두머리는 또 명령을 내려 모든 군사는 청건(靑巾)을 쓰라고 했다. 그러자 모두 청건을 썼는데, 세작은 청건이 없어 또 드러나게 되었다. 우두머리가 말하기를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을 터이니, 돌아가서 너의 주장에게 병서를 더 읽고 오라고 하여라." 했다.
초토사는 다른 계책을 써서 토평(討平)은 했으나 마침내 우두머리는 놓치고 말았다. 구렁에 있는 죽은 사람의 머리를 몰래 가지고 와서 우두머리를 베었다고 거짓 장계(狀啓)를 올렸다.
병정들은 부인들을 강간하고 재화를 약탈하여 허리에 차고 상경하였다. 그러므로 전라도 전체가 먼저는 도적에게 약탈당하고 뒤에는 서울 병정에게 약탈당하여 재화가 비로 쓴 듯이 없어졌다. 그로 인하여 씨를 뿌리지도 못하고 양민이 다 도적이 되어 잠식(蠶食)하며 올라온다고 한다. (주석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