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조약을 맺을 당시의 우리측 대표단과 일본측 대표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정부의 원병 요청국서는 원세개를 통해 청국 정부에 전달되었다.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인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은 5월 1일(음) 수사제독(水師提督) 정여창(丁汝昌)에게 군함을 이끌고 인천으로 출동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와 함께 산해관에 주둔한 섭지초(葉志超)와 태원진총병 섭사성(聶士成)이 지휘하는 청군 910명에게도 출동명령을 내려 충남 아산으로 상륙케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진척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일본은 청군의 파병정보를 입수하고, 5월 6일 주한 일본공사 오도리(大鳥圭介)가 군함 3척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하였다. 오도리는 420명의 육전대가 대포 4문을 이끌고 서울에 입성하고 별도로 오호시마(大鳥義昌) 소장은 6천 명의 혼성여단을 지휘하여 인천에 상륙하였다.
섭지초의 청군 1천 5백 명과 일군 6천 명이 인천에 거의 동시에 상륙한 것이다. 청군은 정부의 요청이었지만 일본군은 불청객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정부나 국민에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은 국제전의 성격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