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 투표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3.15 선거
1960년 3월 15일은 제4대 정·부통령 선거일이다. 자유당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 부통령은 이기붕이었다. 이에 맞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조병옥, 부통령 후보는 장면이 지명됐다. 그런데 민주당 후보 조병옥은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지병으로 쓰러졌다. 도미 후 월터리드육군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사망했다.
3대 신익희 후보의 비운이 다시 반복됐다. 자유당으로서는 제4대 대선에서 강력한 대항마인 조봉암, 신익희가 사라지자 이승만 후보는 '땅 짚고 헤엄치기'로 당선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당시 85세였다. 그래서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 자리는 매우 중요했다. 그런 까닭에 3.15 선거는 부통령 선거로 축소된 모양새였다. 이기붕 후보는 지난 선거 때 장면 후보에게 패한 전력이 있었다. 그래서 자유당은 1960년 3.15 선거에서는 더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붕 후보를 당선시키고자 발버둥쳤다. 이는 곧 부정선거로 이어졌다.
자유당은 경찰과 공무원, 반공청년단, 정치 깡패 등 모든 세력을 총동원해 민주당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1960년 2월 28일은 당국은 일요일임에도 야당 후보자 유세에 방해하고자 대구 시내 중·고교생들을 등교시켰다. 이에 반발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학생들을 정치도구로 이용치 말라"라면서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자유당은 치밀하게 부정선거를 준비했다. 4할 사전 투표, 3인조 5인조 투표, 유권자 명부 조작, 완장부대 동원, 야당 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투표 계산서 조작 등등. 기상천외한 방법을 총동원했다. 이런 부정선거에 시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최초의 유혈시위는 선거 당일인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일어났다. 그날 밤 마산시민 수천 명은 개표장 부근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일제히 정전이 되면서 경찰의 시위대 발포가 시작됐다. 이날 8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4.19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