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6.25전쟁 중 전방부대를 시찰 하는 이승만 대통령(1951. 8. 22.).
NARA
녹음방송
대전에 도착한 이승만은 현지에서 녹음방송을 통해 자신이 마치 서울에 체류 중인 것처럼 위장해 서울시민을 포함한 국민들에게 안심하라고 연설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했으며, 일선에서도 충용 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나 리승만은..."
이 방송을 들은 일부 서울시민은 이 대통령이 경무대에 머물고 있는 줄 알고 피란길을 되돌아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전쟁 발발 66시간 만에 나온 이승만 대통령의 첫 육성은 국민을 속였다.
후일 유엔군이 평양을 함락할 때 김일성도 북한 인민에게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라"라고 해놓고 자신은 감쪽같이 도망쳤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1시 무렵,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인민군 탱크가 서울 미아리 방어선을 막 돌파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급보를 받자, 그는 후퇴 중인 부하들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보다 일단 인민군의 남하를 한강 이북에서 저지해야겠다는 판단이 앞섰다. 그는 즉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 명령을 내렸다.
한강교 곳곳에 미리 폭약을 설치해둔 채 발파 명령을 기다리던 공병들은 이 명령이 떨어지자 즉각 폭파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한강대교를 비롯한 3개 철교의 일부 교각이 큰 폭음과 함께 주저앉았다.
한강교 폭파 시각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무렵이었다. 사전 예고 없는 한강교 폭파로 일대의 숱한 피란민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거나 수장 또는 큰 부상을 입었다. 한강교 폭파로 서울시민들은 '독 안의 쥐처럼' 꼼짝할 수 없게 됐다.
1950년 7월 1일 새벽 3시, 대전에 머물던 이승만 대통령은 또다시 자신의 신변을 불안해 했다. 그래서 소수의 경호요원과 비서를 대동하고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승용차를 타고 다시 대전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부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행로는 대전-대구-부산으로 이어지는 통상적 경로가 아니었다. 그의 승용차는 전북 이리로, 거기서 열차로 타고 목포로 갔다. 목포항에서 소해정을 타고 무려 19시간을 항해한 끝에 부산으로 갔다.
7월 2일 오전에 부산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은 그때까지도 한강방어선이 뚫리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그제야 "내가 잘못 판단했어, 이렇게 빨리 부산으로 오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라고 말한 뒤, 7월 9일 대구로 갔다. 이후 8월 18일에는 대구에서 다시 부산으로 갔다.
그해 9월 28일 유엔군의 서울수복으로 서울에 돌아온 이승만 정부는 적치하 시민들을 부역, 친공, 북한정권에 협력의 혐의로 처벌했다. 한강을 용케 건넜던 '도강파'들은 개선장군처럼 당당했다.
이 대통령의 육성 방송을 믿고 서울에 남은 '잔류파'들은 '빨갱이' '불순분자' '부역자'라는 의혹을 받으며 검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해 10월 4일부터 11월 13일까지 5만5000여 명의 부역자를 검거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7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공유하기
희대의 거짓말 "대통령은 평시처럼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