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0 총선거에서 투표하는 유권자들(1948. 5. 10.).
NARA
반민특위 와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국회의원들은 일제강점기 친일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법을 제정해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반민특위 워원장에는 임시정부 요인 출신의 김상덕, 부위원장에는 김상돈이 각각 선출됐다. 이들은 1949년 정초부터 본격 반민특위 활동에 특위 활동에 들어갔다.
그해 1월 8일에는 화신재벌 친일기업가 박흥식 검거에 이어서, 일본군 첩자로 활동한 이종형, 강우규 열사를 체포한 김태석, 중추원 부의장 박중양, 임전보국단장 최린,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 고문경찰관 노덕술, 공주 갑부 김갑순, 사학자 최남선, 문학가 이광수, 밀정 배정자 등을 속속 체포했다.
하지만 반민특위가 활동을 시작하자 곧장 방해공작이 잇따랐다. 피압박 민족이 독립하여 나라를 세우면 가장 먼저 부역자들을 청산해야 할 대통령이 반민특위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이승만은 애초부터 반민법 제정 자체를 반대했다.
그는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자 "반민자 처단에 신중을 기하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은 우선 신생국가의 조직을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로 이를 위해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의 권력을 지탱해주는 세력이 친일분자로 친일세력 척결은 곧 자신의 권력을 약화키는 결과로 판단했던 것이다.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비롯한 친일경찰 간부들을 체포하자 이승만은 특위위원들을 불러 이들을 석방하라고 노골적인 압력을 가했다. 그 방해공작의 압권은 1946년 6월 6일,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사건이었다.
당시 김태선 시경국장의 지시를 받은 윤기병 중부경찰서장은 부하를 이끌고 6월 6일 아침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다. 이들은 출근하던 특위 요원 35명을 불법 체포했다. 이는 정권의 비호 아래 이뤄진 일로, 쿠데타와 마찬가지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반민특위는 사실상 와해됐다.
그 결과 해방 7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는 친일파 처벌 논의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 특위 방해로 친일파들을 척결치 못하고 문제를 희석시킨 결과다. 이로써 우리 사회의 도덕성과 민족정기에 크나큰 상처를 입혔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한, 곧 첫 단추를 잘못 꿴 것과 같은 오점은 이후 우리 사회에 정의감과 양심의 훼손 그리고 기회주의자들을 양산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