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한 지 며칠 후 간식을 먹으러 나오는 달이
박은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고양이
보통 고양이는 강아지보다 손이 덜 가서 키우기 쉽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런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고양이를 하루 종일 인형처럼 방치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고양이도 오랫동안 혼자 있으면 외로움을 탄 기색이 역력하다. 집에 돌아온 집사를 현관까지 마중 나오며 왜 이제 왔느냐고 소리 높여 나무라기도 하고, 잠잘 때는 꼭 가슴팍으로 파고들어 머리를 비비며 체온을 느끼기도 한다.
영역 동물이기에 집에서 생활하는 데 안정감을 느끼지만, 대신에 그 안에서 본능적인 에너지 소모를 유도하고 필요한 자극을 충족시켜줘야 한다. 그래서 최소한 하루에 20분 정도는 꼭 놀이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고 한다. 고양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이용해 마치 사냥하듯 놀아주는 것인데, 이렇게 에너지도 분출하고 스트레스도 풀 수 있다.
특히 야행성인 고양이들은 하루 종일 잠만 자다가 굳이 집사가 까무룩 잠들 때쯤이 되면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우다다를 한다. 우다다란, 거의 고양이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력으로 집안을 누비며 뛰어다니는 것이다. 우다다로 인한 불면의 밤을 줄이고 싶다면 깨어 있을 때 최대한 장난감을 이용해 놀아주는 것이 하나의 팁이다.
그런데 달이는 뭔가 이상했다. 입양할 때부터 보호소의 봉사자로부터 달이가 장난감에 반응이 없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 집에 달이 취향에 맞는 장난감 한두 개는 있겠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달이는 정말 장난감에 반응이 없었다. 깃털이나 비닐 날개가 흔들리면 지나가던 고양이도 한 번쯤 고개를 휙 돌려 시선을 보내기 마련인데, 달이는 아예 장난감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는 일이 없었다. 아니, 시선으로 좇기는커녕 장난감을 쳐다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왜일까? 어릴 때부터 보호소에 있어서 장난감으로 놀아본 경험이 적어서일까? 다른 고양이들이 많아 순서가 잘 오지 않다 보니 장난감에 흥미 자체를 잃게 된 걸까? 다른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성격과 학습으로 빚어진 행동인 것 같아서 왠지 안타까웠다.
다른 고양이들과 전혀 싸우지 않는 것도 그랬다. 제이나 아리가 툭툭 시비를 걸어도 달이는 가만히 자리를 피해 버렸다. 만약 달이가 원래 있던 제이와 아리를 때리거나 괴롭혔다면 어쩔 수 없이 그것대로 속이 상했겠지만, 그래도 예상 범위 내의 충돌조차 없이 반응 자체가 적으니 그것도 마음이 쓰였다.
항상 크게 상처받지 않는 것처럼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도 실은 상처가 덧대어져 딱딱한 딱지가 생겨버린 경우가 있지 않은가. 온종일 그냥 느릿느릿 걸어다니며 아무 데나 털썩 눕는 달이를 보는 마음이 그랬다. 사실은 사랑이 너무 필요해서, 사람이 부족한 환경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방법을 배워버린 것은 아닐까.
가장 안전하고 안락한 곳에서
달이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한 건 우리 집에서 지낸 지 거의 1년을 넘겨서였던 것 같다. 평소처럼 장난감으로 제이, 아리와 놀아주다가 달이 앞에서 몇 번 흔들어보았다. 꼭 거실 한복판에 누워 뛰어다니는 고양이들을 걸리적거리게 만들 뿐이던 달이가 갑자기 장난감을 따라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어? 달이가 장난감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고개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날은 그게 전부였지만, 그 후로 달이는 조금씩 장난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제이나 아리처럼 날렵하게 뛰어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대신 발라당 누워서 허공에 앞발을 휘적거리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달이는 원래 놀지 않는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사실 내면 저 구석에는 사냥 유전자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우리 집에 온 지 2년쯤 지난 지금, 달이는 우리 집에서 제일 말이 많은 고양이가 됐다. 눈만 마주치면 냐아아앙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데 대개는 빨리 맛있는 걸 내놓으라는 뜻이다. 지나가는 고양이에게 괜히 시비를 걸곤 하는 제이가 솜방망이를 휘두르면, 달이는 이제 지지 않고 눈을 꾹 감고 앞발을 휘두르며 같이 싸운다.
달이는 이제 이곳이 평생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보금자리라는 확신이 생긴 걸까? 달이에게도 이 공간에 대한, 그리고 집사에 대한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걸까?
길고양이와 유기묘 출신의 세 마리 고양이를 키우면서, 나는 정말로 이 과정을 사랑하게 되었다. 경계심 많은 낯선 고양이가 내 품 속에 들어와 어느 순간 마음을 열게 되는 그 변화의 과정. 처음에는 어둡고 구석진 곳을 찾아 숨던 고양이가 내 집 거실에서 배를 다 뒤집고 발라당 누워 잠들 때 느껴지는 애틋한 고마움.
아마 성묘를 입양하거나 유기묘를 입양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우리가 진정한 가족이 되었음을 알게 되는 놀라운 감동을 분명히 느껴봤을 것이다. 어쩌면 마음을 열고 가족이 되는 건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가 결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에게 상처받고도 다시 무방비하게 사랑을 쏟아준 달이 덕분에, 우리는 정말 가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