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목에 꽃다발을 건 이) 환영식(앞열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미상. 1920. 12. 28.)
눈빛출판사
이승만의 도미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이승룡(李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조선조 양녕대군 16대손으로, 아버지 경선(李敬善)과 어머니 김해김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77년 서울로 이사해 온 뒤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1891년 박승선과 결혼했다. 1898년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독립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1899년 1월 고종 황제 폐위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5년 남짓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904년 8월 9일에 특별사면령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해 11월 민영환과 한규설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5년 2월 워싱턴 D. C.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입학한 뒤 그해 8월 루스벨트 대통령과 만났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 보존을 청원했다. 1910년 8월 귀국 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청년부 간사이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압박을 받자, 그해 4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0년대 초 옥중에서 만났던 박용만의 도움으로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그 뒤 한인감리교회의 한인기독학원을 운영하였으며, '태평양 잡지'를 발간했다.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무력투쟁을 위해 국민군단을 창설하자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을 주장하면서 두 사람은 의견 차이로 그때부터 서로 대립했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초대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는 안창호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상하이에 오지 않고 미국에서 임시정부 직제에도 없었던 대통령 행세를 했다. 그런 가운데 1919년 9월 임시정부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자 이승만은 그 이듬해인 1920년 12월에 상하이로 부임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