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남문현재 남은 전주성의 흔적 중 하나인 풍남문. 한옥마을·경기전·전동성당 인근에 위치해 있다.
이준혁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리하여 5월 3일에는 설욕전에 나섰다.
농민군 5천여 명이 전주성 북문을 열고 나와서 관군과 접전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화력도 크게 향상된 터이어서 전투는 농민군의 참담한 패배를 가져왔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 5백여 명이 다치거나 죽었다.
농민군 지도자 김순명 등이 죽고, 전봉준은 머리와 허벅지를 다쳤다. 이날 오후 6시경 농민군은 성안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홍계훈은 동학농민군의 투지를 두려워하여 공격을 피하고 완산에서 위협적인 발포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일본인 연구가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전한다.
1일 오전 10시 동학농민군은 돌연 남문을 나와 경군 진지를 향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미진교를 건너 남북 2대로 갈라진 동학농민군은 완산 주봉에 있는 경군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남쪽으로 향한 일대는 순창가도로 나아가 남고천을 건너 곤지산으로 올라가고, 또 다른 일대는 전주천의 좌안을 끼고 완산동으로 들어가 주봉을 공격한 다음 건너편 검두봉 언덕에 포진한 관군의 일대를 역습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일거에 완산을 점령하고 본영을 공격하기 위해 매곡을 사이에 두고 주봉과 검두봉 사이에서 일대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손에 손에 창, 대창, 화승총을 들었고, 그 가운데는 무기를 가지지 않은 자도 있어 이들은 소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진격하였다. 이들 동학농민군은 탄환을 물리치기 위한 방편으로 노란 종이에 주문을 써서 등에 붙이고, 또 십 수인씩 집단을 이루어 높게 백포장을 펴 세우고, 주문을 큰소리로 외며 비 오듯 쏟아지는 탄환 속을 뚫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