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전주성문안 풍경1909년 전주성문안 풍경
전주역사박물관
정부에서는 전주성이 함락당한지 이틀이 지난 뒤에야 이 사실을 보고받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입성 광경을 『전주부사(全州府史)』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동일 (음력 4월 27일) 적도(賊徒)는 나아가 전주 삼천에 둔하고 다시 전주성으로 몰려와, 정오경 먼저 부서(府西)의 완산을 점거, 나팔을 불고 부내(府內)를 향하여 소총을 난사함으로써 시장부근은 형용할 수 없는 혼란에 빠져 서민들은 앞을 다투어 피난하였다.
경기전 전의에는 도도군(道徒軍)의 포성이 우뢰와 같이 진동하고 완산 정산에 이른 도도군은 무려 수만 명이 일자로 진을 펴고 서문으로 몰려들어, 성안의 부민들과 충돌, 호곡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당시 신임감사 김학진은 아직 부임해 오지 않았고, 전 감사 김문현이 감영에서 군령을 발하여 부민과 더불어 4문을 수비하였다.
모인 자들 중에는 혹은 궁시를 가지고, 혹은 성벽 위에 많은 돌을 옮겨 이를 던져 몰려오는 적(동학농민군)을 막으려 하였고, 또 남문 밖 성벽에 연해 있는 20~30호의 민가를 방해가 된다고 하여 성병(城兵)이 스스로 이를 소각하는 등 방어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영부 관속 가운데는 몰래 적과 내응하는 자가 나와 마침내 강적을 지탱할 방법이 없어 겨우 포 일발을 응사했을 뿐, 힘없이 궤주하여 적도 3천여 명이 조수와 같이 남문으로부터 성내로 쇄도하였다.
한 일본인 연구가는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입성 과정을 다음과 같이 썼다.
황토현의 싸움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둔 동학군은 다시 백산에 집합하였는데, 여기에서 군대의 위용은 정리되었고 사방에서 동지를 많이 불러 모았다.
큰 승리의 보고가 일단 사방에 전해지자, 무장에서 군대를 일으켜 태인과 부안 지방을 횡행하였다. 손화중은 손천민과 함께 와서 합쳤으며 이상옥은 보은에서 봉기하였다. 최경인은 태인에서 참가하였으며 김개남은 남원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정종혁은 고부에서, 허공집은 공주에서, 임정학은 정읍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김봉년은 김제에서, 오하영은 고창에서 동지를 모아서 합쳤으며, 배규인은 무안에서, 진우범은 만경에서, 김덕명은 금구에서 일제히 호응하였다. (주석 9)
전봉준의 군대는 4월 15일 삼삼오오의 대오를 정리하여 청ㆍ황ㆍ적ㆍ백ㆍ흑의 5색 깃발과 경천안민(敬天安民)의 깃발을 세우고 손에는 염주를 들고 입으로는 주문을 외웠다. 이것은 마치 십자군의 행진, 성스러운 교도들의 행진과도 같았으며, 태인, 장성 등 여러 고을을 지날 때마다 동지를 모아 전주로 전진하였다.
행군하는 길가에는 남녀 모두 축복하며 이들을 맞이하였고, 장성을 지나 전주에 가까울 무렵에는 전체 군사가 약 1만 명에 도달하였다. 술을 싣고 역머리에 마중나온 사람도 있었고, 처자와 친척들이 서로 부둥켜안으며 참가하는 동지를 배웅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광경은 마치 인의(仁義)로운 왕자(王者)가 군사를 일으킨 것과 같이 길가 곳곳에서 환호가 터졌다. (주석 10)
주석
8> 이이화, 「전봉준과 동학농민전쟁②, 투쟁-반봉건 변혁운동과 집강소」, 『역사비평』, 계간8호, 316쪽, 1990.
9> 문순태, 앞의 책, 131~132쪽, 재인용.
10> 『동학농민전쟁연구자료집(1)』, 176~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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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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