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전적지 기념탑에 조각된 동학농민군들. 장태를 굴리며 관군에 맞서는 모습이다.
이돈삼
당시 농민군이 사용하여 관군을 놀라게 하고, 전세에 크게 영향을 미친 '장태'에 대해 알아본다.
농민군은 장태를 앞세우고 관군에게 돌진했다. 장태는 청죽(靑竹)을 얽어 만든 것으로 그 밑에 차바퀴를 달았다. 그 속에 사람이 앉아 총을 쏘았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는 그 둘레가 열 아름쯤 되고 길이가 열 발쯤 되었다고 한다. 광산(光山) 접주 이춘영의 손자 이찬종과 이현종의 증언에 따르면, 장태의 크기는 길이가 11~12자였고 높이가 4.5자였다고 한다.
그들의 아버지 이규익(李圭益 : 1898~1973)은 장태는 방탄용으로 당시 죽세공 기술자들이 황룡촌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임곡(臨谷)의 가정부락에서 대나무를 베어다가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에서 7, 8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장태는 대를 쪼개 원통을 만들고 그 안에 볏짚을 채워 넣은 일종의 방탄차였다. 황현은 "큰 죽룡(竹龍)이 몰려오는데, 크고 둥글며 닭우리처럼 생긴 것이 수십 개다.
게다가 밖에는 칼을 꽂아서 마치 고슴도치와 같고 아래는 두 바퀴를 달아서 굴러서 몰려온다. 관군이 연환과 시석을 쏘았으나 죽룡이 모두 막아주고 적은 그 뒤를 따라 포를 몰면서 몰려온다."는 기록도 있으나, 바퀴가 달렸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것 같다.
장태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기록이 일정하지 않다. 오지영은 장흥 접주 이방언이 장태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장태라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최현식의 주장에 따르면, 장태를 만든 사람은 이방언이 아니라 담양의 이용길(1857~?)인데 그는 월평 싸움에서 장태를 만들어 이장태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또 이찬종의 증언에 따르면, 장태를 만든 사람은 그곳의 죽세공이었던 김남수라고 하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월평 삼봉에서 관군이 연환과 시석을 쏘았으나 모두 죽롱이 막아내고 농민군은 그 뒤를 따라 포를 쏘면서 몰려왔다. 초토사의 대영(大營)에서도 멀리 바라보기만 하고 구원할 수가 없어서 제 마음대로 달아나게 내버려두니 농민은 쫓지 않고 군사를 거두어 퇴각했다. 이날 죽은 관군의 수가 7명이요 대환포 2문을 빼앗겼다.
농민군 가운데는 대환포에 맞아 죽은 자가 많아 이들을 끌어 모아 무덤 17개를 만들어 하나에 시체 4, 5구씩을 묻었다. 농민군은 다시 월평으로 들어가 마을 가득히 깃대를 세우고 밥을 지으려 하다가 경군이 습격해온다는 말을 듣고 나팔소리 한 번 나더니 군사를 재촉하여 앞으로 나가는데 말탄 자가 200여 명이었다. (주석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