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정약전골목 입구의 동아쇼핑센터 맞은편 적십자병원(지금은 폐원 상태) 뒤에 있다.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지만, 그보다도 최제우가 처형된 곳으로 이름이 높다.
정만진
동학의 교조 최제우가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 지 7년째 되는 날인 3월 10일 이필제가 주동한 5백여 명의 도인과 농민이 교조 신원과 관의 탐학을 규탄하고자 탐관의 소굴로 알려진 영해부성으로 달려가 밤 9시경 관아를 포위했다. 갑작스런 군중의 침입에 당황한 포졸들의 발포로 1명이 죽고 1명이 부상당했지만 마침내 관아를 점령했다.
이필제는 달아나던 부사 이정을 붙잡아 관아 앞뜰에 꿇어앉히고 치죄하였다.
"너는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로서 정사를 잘못하여 세상을 어지럽혔다. 백성을 학대하고 재물을 탐하기가 저와 같으니 네거리에 방이 나붙게 되었고 시중에는 원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것이 읍내의 실정이니 네 죄가 어디 가겠는가. 용서하려 하지만 의로써 탐관오리인 이정을 죽여야 한다."고 꾸짖었다.
이정은 끝내 반성하지 않다가 동학도인의 장검에 목이 잘렸다. 날이 밝자 이필제는 관아에 있던 공전 150냥을 풀어 마을의 빈궁자들과 인근 5개 마을 주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도록 했다. 이필제는 이참에 영덕군 관아를 점령하고자 했으나 50리나 떨어진 곳이고 이미 방어에 나섰을 것으로 판단, 도인들과 영해관아를 물러나 산속으로 은신했다. 부사가 참수되었다는 소식에 인근 지역 수령과 관리들 중에 도망치는 자가 속출할 만큼 경상도 일원의 관가에 비상이 걸렸다.
이필제는 14일 최시형이 은거 중인 영양 일월산으로 들어갔다. 따르는 사람이 40여 명에 불과했다. 한편 정부는 흥해군수 김홍관을 영해부 겸관으로 임명하고 영덕현령 정중부와 인근의 영일ㆍ장기ㆍ청하의 현감을 출동시켜 일월산을 포위, 샅샅이 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