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기념관 지역에 서 있는 전봉준 동상. 1987년 김경승이란 사람이 제작했다.
안병기
교단에서는 "도인들에게 병복(兵服)을 입혀 조정의 간당(姦黨)들을 소탕하고 정부를 개혁하자"는 강경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최시형ㆍ손병희 등 교단 지도부가 강경론 대신 국왕에게 직접 상소하는 계획을 세웠다.
삼례도회소에 참집한 동학도는,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과 동학에 대한 지방관청의 탄압 중지를 결의하고, 이를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전라도 관찰사 이경식에게 진정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이경식은 이 진정서를 수리하였으나, "동학은 조정에서 금하였기 때문에 이 이단에 부화에서 범죄를 범하지 말고, 곧 퇴거해서 다시 미혹되지 말라"고 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반답에 대해 동학도는 몹시 분격하였다.
그래서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12월 25일 전주집회를 개최하고, 관찰사에게 재차 진정서를 내고, 각지에서 동학도의 재산을 몰수해서 사복한 관헌이나 군대의 단속을 요구하고, 또한 교조의 신원과 함께, 동학을 이단자로 규정한 이유를 추궁하였다.
이 동학도의 요구에 대해 관찰사는 조정의 방침이 이미 동학을 이단종교로 규정하고 있고, 조정의 지시에 의하여 동학을 금지할 뜻을 분명히 하였다. 거기에서 전주에 모인 동학도는 지방의 관헌으로서는 해결되지 못함을 인득하고, 직접 정부에 상소하기로 결정하고, 그 집회를 해산하였다. (주석 7)
주석
6>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제2편, 48쪽.
7> 신국주, 앞의 책,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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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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