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 광화문광장 동북쪽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동학은 이같은 법소 - 포 - 접주제의 끈끈한 조직으로 유지되었다. 관의 탄압과 교통이 지극히 불편했던 시기에 삼례집회를 비롯하여 도처에서 수차례 수천, 수만 명씩이 모이게 된 것은 도인들이 지역의 포 - 접제를 통해 연대가 이루어졌기에 가능하였다.
초기 동학도인들의 소망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교조의 신원이었다. 고종 정부가 외래종교인 기독교와 천주교에는 박해를 거두면서 자생종교인 동학은 심하게 탄압하면서 도인들의 분노와 반항심을 불러일으켰다.
관리들은 동학도인들의 재산을 갈취하거나 이유불문하고 관가로 끌어가 매 타작을 일삼았다. 이로써 많은 도인들이 족보에서 제명되거나 친척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당했다.
동학은 민간 종교단체로서 명실공히 조직화되었다. 그러나 동학에 대한 관헌의 탄압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특히 동학에 모이는 자들이 현세를 통탄하고, 관인의 부정과 외국의 압박에 불만을 가지고 시사를 논함에 이르니, 나날이 그 탄압은 우심해졌다. 당시 유교ㆍ불교ㆍ선교의 삼종교가 함께 퇴폐해서, 민중의 정신적인 위안처로서는 동학밖에 없었기 때문에, 동학도의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이에 다다라 조정은 동학의 세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1885년에 충청도 관찰사 심상훈에게 명하여 다시금 동학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동학은 천주교의 포교가 이미 허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학만을 엄금함은 부당하다고 지탄하고, 제2교주 최시형에게 청해서,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호소하였다. 최시형도 이 동학도의 요망에 좇아서, 드디어 이 운동을 일으키는 데 동의하였다.
이리하여 1892년 12월, 제2교주 최시형은 손천민에게 명하여 격문을 초하게 해서 이를 각 도의 동학도에게 통보하였다. 따라서 각지의 접주는 동학 각 포내의 동학도에게 전하여, 이 운동에 참가하도록 호소하고, 그 집회를 전라도 삼례 도회소에서 열기로 하였다. (주석 2)
주석
1> 이희근, 「1894년 동학교단의 포접제」, 『사학지』, 194~195쪽, 단국사학회, 1997.
2> 신국주, 「감오동학혁명의 발생사적 배경」, 『갑오동학혁명의 쟁점』, 116~117쪽, 집문당,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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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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