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24일 오전 홍콩 레이몬디 대학에서 구의원 선거 투표를 마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희훈
2008년에 캐리 람은 발전국 국장이었다. 발전국은 1997년 당시의 환경계획발전사무국(規劃環境發展事務局)이 세 차례 조정을 거쳐 2007년에 출범한 부서로, 국토교통부에다가 문화재청 기능을 더한 곳이다. 캐리 람은 발전국이 출범한 그해 7월 1일부터 2012년 6월 30일까지 국장을 역임했다.
그가 발전국장으로 취임할 당시, 홍콩 사회는 시설물 철거 문제로 대규모 갈등을 빚고 있었다. 식민지 시절 시위 장소로 유명했던 천성부두와 종탑 그리고 영국 군주와 총독이 상륙했던 장소인 황후부두를 철거하고 재개발하는 문제로 혼란스러운 양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후부두의 원래 명칭은 '동상 부두(Statue Pier)'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영국의 전성기를 구가했을 뿐 아니라 영국·프랑스가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나라를 굴복시킬 때의 군주인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1901년)의 동상이 근처에 있었다. 동상 부두란 명칭은 1924년 7월 31일 '여왕 부두(Queen's Pier)'로 개칭됐다.
중국 역사는 한국사나 일본사와 달리 여성 군주에 익숙하지 않다. 여성 군주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690년에 주나라(무주)를 세운 무측천도 황제가 아니라 황후로만 기억되고 있다. 황제 이전에 황후였다는 점을 근거로 측천무후로 불리는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배경 때문에, 영국인들이 '여왕 부두'로 명명한 곳을 홍콩인들이 '황후 부두'로 부르게 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어떤 논문에서는 홍콩인들이 영어를 잘못 번역한 결과일 거라고 추측하지만, 그보다는 '여왕'을 중국식으로 재해석한 결과라고 봐야 옳을 듯하다.
중국 정부가 황후부두 등을 철거하려 한 것은 표면상으로는 도시 개발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영국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2018년에 <중소 연구> 제42권 제3호에 실린 이종화 목원대 교수의 논문 '홍콩의 집단 기억과 시위 그리고 정체성 정치'는 이렇게 설명한다.
"홍콩은 이민과 피난의 다문화 사회이자 영국의 식민지배를 통해 역사에 비로소 등장하면서 전통과 토착의 의미가 결여된 국제화된 도시 사회였기에, 운명공동체로서의 견고한 집단의식을 공유하기 어려운 구조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중국과 차별화되는 홍콩에 대한 상상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장소성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장소의 상징성을 제거함으로써 집단 기억을 통한 홍콩 정체성이 구성되지 못하도록 하는 시도를 지속한다."
홍콩인들은 공통의 역사적 경험이 짧은 탓에 특정 장소를 매개로 심리적 통합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 중국 정부가 주목했다는 것이다. 논문은 중국이 그 같은 시도를 한 것을 "공유된 장소에 대한 기억이 제거되면 홍콩인의 운명공동체적 동질성도 약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면서 "천성부두, 황후부두 그리고 종탑 철거는 바로 장소성과 관련된 정체성 정치의 현장이었다"라고 분석한다.
'황후부두' 철거를 단행한 캐리 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