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9일 오후 3시께, 계엄군들이 광주 금난로와 충장로로 출동, 전 지역을 들쑤셔대는 모습.
5.18기념재단
광주시민들이 경찰과 공수부대의 살인적인 폭력에 저항하며 궐기한 5월 18일이 저물고 둘째날 19일이 밝았다. 밤 사이에도 시내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무자비한 탄압과 검거가 계속되었다.
분노와 공포의 밤을 지새운 시민들은 시내상황을 살피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초ㆍ중ㆍ고등학교와 관공서, 일반 기업체는 정상근무를 계속했으나 시내의 상가들은 대부분 철시했다. 대동고와 중앙여고 등 일부 고등학생들이 교내시위를 주도하게 되고, 오후로 접어들수록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날 오후 시내 중고등학생들을 귀가 조치시켰다.
7공수여단이 11공수여단에 배속되고 31사단 병력을 재배치시키는 등 전열을 정비하고 탱크까지 동원한 공수부대원들의 잔인한 진압에 시위군중은 방화와 투석, 화염병 투척으로 맞섰다.
녹두서점을 비록한 시내 곳곳에서 화염병이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화염병은 투석이나 도로변의 대형 화분을 바리케이드로 이용하는 소극적 방어와는 달리 공격용으로 등장한 새로운 무기였다. 이처럼 심각하게 진행되는 시위상황은 11공수여단장으로 하여금 현장점검에 나서게 했고, 현지 지휘관은 시위진압을 위해 1개 공수특전단을 증원해 주도록 요청했다. (주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