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당시의 계엄군. 국립 5·18 묘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대학생들의 시위가 고등학생들까지 나서는 시민항쟁으로 격화된 것은 계엄군으로 동원된 공수부대의 비인간적인 만행이 직접 도화선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일체감이었다.
4ㆍ19혁명이 고등학생→대학생→시민으로 확대된 것은 이승만의 학정과 3ㆍ15 부정선거에 대한 분노의 공감이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날 오전 11시경부터 시위진압에 탱크가 동원되고, 공수부대는 금남로ㆍ충정로 일대의 다방ㆍ여관ㆍ건물ㆍ민가 등을 샅샅이 뒤져 시민들을 구타하고 반항하면 총검으로 난자질했다.
1980년 5ㆍ18광주항쟁은 신군부의 우두머리들이 적어도 '미필적 고의'에 의해 대량 학살을 유도한 사건이었다. 당시 시민군에게 붙잡힌 공수부대원은 광주에 배치받기 전 3일 동안이나 식량배급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투입되기 직전에는 소주를 공급받았다고 증언했다.
가장 중요한 건 이들이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투입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주석 7)
전두환 일당은 공수부대원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3일 동안 식사를 주지 않고 술을 먹여 광주에 투입했다.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저들의 만행은 이제 시작단계에 있었다.
주석
4> 『정사 5ㆍ18』, 182~183쪽.
5> 앞의 책, 31쪽.
6> 앞의 책, 37쪽.
7> 최영진, 『한국지역주의와 정체성의 정치』, 286~287쪽, 오름, 1999. 강준만ㆍ김환표, 「신군부의 5ㆍ18 용공조작 음모」, 『희생양과 죄의식』, 206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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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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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굶기고 광주 투입 직전 공수부대원에 소주 먹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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