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숙과 세아들김성숙과 세아들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1964년 1월 27일 월요일
따스하고 맑음.
항산의 요구가 있어 약력을 정리하였는데 나의 70평생의 행로란 실로 고난의 생활이었고 형극의 행정(行程)이었다.
나는 유소년 시에 중시하(重侍下)에서 자라날 때가 가장 행복했었고 19세시 집을 떠난 후부터는 금일까지 약 50년간 잠시라도 안정된 생활을 해 보지 못하고 항상 혁명 폭동 전쟁 당쟁 감옥 등 생사선상에 악전고투의 생애를 하여 왔다.
나의 유일한 명분은 민족국가의 독립과 민주체제의 확립과 행복된 사회의 건설이었다. 나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 내가 만약 이러한 생활을 괴롭다고 했다면 벌써 혁명대열에서 이탈했을 게고 또 안일한 생활을 영위할 수도 있었을 게다. 그러나 나는 이 고된 생활을 감수하였고 또 자긍자만하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
(주석 6)
1964년 2월 13일 목요일
춥고 맑음 구정.
오늘은 구력 정월 초1일이다. 고희가 몇 해 남지 않은 것을 생각하니 인생의 무상과 더불어 나 자신의 파란만장한 고난의 일생을 스스로 동정하며 서글픈 생각이 든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이라도 더욱 발분해서 국가와 민족을 운명의 숨길이 끊어지는 날까지 모든 고난을 참고 견디며 꾸준히 나의 걸어온 길을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이미 불효한 자가 되었다. 위로 부모와 밑으로 자녀들에게 내가 인간으로서 부하된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을 항상 깊이 뉘우치며 자책한다. 그러나 나는 이 불효막심한 죄를 국가에 충성하므로써 희생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이 몸이 나라를 위해서 희생할 수 만 있다면 나는 나의 할 일을 다 한 것이 될 것이다.
(주석 7)
1964년 3월 1일 일요일
따뜻하고 맑음.
오늘은 삼일절이다. 3ㆍ1절은 나의 일생 진로를 결정지여준 날이다. 내가 만약 3ㆍ1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면 30년간 해외망명 생활과 해방 18년간 피억압 생활을 하게 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나의 고난의 일생은 매년 3ㆍ1절을 맞이할 때마다 마치 활동사진처럼 생생하게 되새겨진다. 망명생활시대에는 삼일절기념에 참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떠한 경우에 처해 있더라도 우리 동지들은 삼일절을 꼭 지켰다.
그러나 환국 후 우리는 삼십여 년간 목숨을 걸고 지켜오던 태극기와 삼일절을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에게 빼앗기게 되고 그 깃발을 빼앗은 자로부터 폭악무도한 박해를 받아왔다. 그러므로 나는 매년 삼일절에 참석하지 않고 그 공작기념식을 심중으로부터 저주하게 되었다. 역사는 이러한 우습광스러운 희극을 연출하는 것인가?!
(주석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