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사진168〉 다뉴세문경 뒷면(왼쪽)과 앞면. 지름 21.2cm.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뒷면 무늬는 기하학적·추상적·상징적 무늬일까
<한국사3-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국사편찬위원회, 1997)에서 이건무는 다뉴세문경을 일러 "얼굴을 비추어보는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라 태양빛을 반사하는 기능을 가진 종교적 주술적 의식에 쓴 의기의 하나"로 본다(218쪽). 이와 달리 심봉근은 중국 청동거울을 다루면서 "왕실이나 제후 등 지배계층의 권위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널리 사용되었을 것"이라 한다(앞의 책, 296쪽). 다음은 복천박물관과 유홍준의 견해이다.
동경은 제사장의 종교적 혹은 주술적인 도구로써 신과 접속하는 의기로써 (……) 태양이나 우주를 상징하는 도구로써 절대자의 뜻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활용되었을 (……) 왕을 비롯한 최고 지배자층의 무덤에서 출토된다.
- 복천박물관, 《신의 거울 동경》(2009), 8쪽
청동거울은 흔히 얼굴을 비추는 거울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제관이 햇빛을 반사시키는 의기로 사용하였다. 오늘날 무속에서 무당들이 춤을 출 때 사용하는 명두(明斗 또는 칠성명두)라는 놋거울과 같은 성격이다. 거울에 달린 꼭지는 손목에 끈을 끼우는 장치다. 그리고 거울 뒷면에 가는 선과 동심원을 기하학 무늬로 새긴 것은 태양과 햇살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 유홍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1》(눌와, 2012), 48쪽
이렇듯 우리 학계에서는 다뉴세문경을 '종교적' 의기의 하나로 보고, 그 문양은 태양과 햇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다뉴세문경종합조사연구>(한국기독교박물관, 2009)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보고서에서 이청규는 거울 뒷면 무늬를 '기하학 무늬'라 하고, 거울을 "태양을 상징하는 신기(神器)로서 종교적 권위와 위세의 상징물인 바 그 수요자는 주지하다시피 당시 일정 지역 집단의 우두머리이거나 이에 버금가는 실력자"일 것으로 짐작한다(앞의 책, 33쪽).
그런데 이것은 모두 그저 '짐작'일 뿐이고 어떤 '근거'도 없다. 더구나 우리 한반도 역사에서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에는 종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한마디로 신(神)의 형상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종교적 의기'로 단정 짓는 것은 문제가 있다.
거울 뒷면 무늬에 대해서도 미술사학자들은 기하학적 추상무늬, 기하학적 양식, 추상적·상징적 무늬라 하면서 거의 모두 비슷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 뒷면에 있는 동심원 여덟 개도 팔원문 내지는 원권문이라 한다. 김원룡·안휘준은 <한국미술의 역사>에서 거울 뒷면 무늬를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신석기시대 이래 기하학적, 추상적, 상징적 무늬의 전통이 더욱 정치하게 발전된 양상을 드러낸다. 세문경은 당시에는 아무나 가지고 얼굴을 보는 도구가 아니라 그것을 몸에 달아 권력이나 초인간적 신통력·벽사력(辟邪力) 따위를 상징하는 의기로 쓰였으리라 추측한다.
-김원룡·안휘준, <한국미술의 역사>(시공사, 2016), 43쪽
이는 앞에서 든 유홍준의 의견과 거의 같다. 하지만 김원룡·안휘준을 비롯하여 유홍준처럼 거울 뒷면 삼각형 속 빗금과 동심원을 기하학 무늬로 본다든지, 태양과 햇살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무늬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먼저 이 무늬는 '기하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고학자들이 어떤 무늬를 두고 '기하학적 추상무늬'라 할 때는 그도 이것을 모르고 있구나, 하고 고쳐 읽어야 한다).
또 한반도 청동기 미술은 '추상미술'이 아니라 '구상미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한반도 신석기인과 청동기인이 '추상미술'을 할 까닭이 없고, 문제는 우리가 아직 그것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뒤에 자세히 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