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3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아크로광장에서 열린 ‘조국 교수 stop! 서울대인 촛불집회'에 참가한 학생과 졸업생, 시민들이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는 모습.
유성호
'조국개미지옥'이라는 유행어가 하나 있다. 조국 이슈로 말 몇 마디 섞기 시작하면 진실과 거짓, 진보와 보수, 세대와 연령, 학벌과 연고 등 모든 익숙한 인간적 경계가 허물어져 버리고, 온통 뒤죽박죽이 돼 버린다는 것이다.
필자도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오랜 분단시대와 흑백시대를 살아오면서 '너는 어느 편이냐?'라고 편 가르는 데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아빠가 좋니? 엄마가 좋니?'라고 묻는 것은 아이에게 정신분열의 씨앗을 심는 것이라는 심리학의 담론이 있다. 지금 우리의 기성세대가, 정치와 언론이 청년세대에게 접근하는 방식이 대체로 그러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밀레니얼 혹은 더 새로운 Z세대의 가치관과 대화법에 기성세대가 더 귀기울여야 한다. 새로운 세대는 다짜고짜 '너는 어느 편이니?'라고 결과론적으로 묻는 것을 불편해 할 수 있다.
KBS와 한국리서치가 지난 8월 22~23일에 조사하고 발표한 '조국 후보자의 인사 적합성'에 대한 여론 조사 결과가 하나의 사례다. 조사결과 전체 평균으로는 부적합 48%가 적합 18%를 훌쩍 넘겼다. 중요한 것은 '판단유보'가 34%에 달했다는 점이다. 더 중요한 것은 2030세대의 경우 '판단유보'가 부적합보다 높았다는 지점이다. 왜일까? '인사청문회'를 '직접' 보고 '내'가 판단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청년세대에게 '다짜고짜 어느 편?'이라고 치고 들어오는 기성세대를 흔히 그들은 말이 안 통하는 '꼰대'라고 인식한다.
2030세대는 공정성에 민감하다.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 왜 청년세대는 쏟아지고 넘쳐나는 정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판단유보'를 선택했을까? 해석은 이렇다. 먼저 청년세대는 자신의 사고와 언어로 이 문제를 해석하는 데 무엇인가 불충분함을 느꼈을 것이다. 정치와 언론이 제공하는 '정보와 언어'가 청년세대에게 많은 부분 부적절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기다렸을 것이다. 자기의 언어로 해석이 될 때까지 말이다.
한 가지 더는 청년세대에게는 어쩌면 '불법이냐 합법이냐의 결론'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대화의 과정'이였다고 생각한다. 즉 조국과 그의 자녀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합법화된 불공정'의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신들의 고뇌와 어려움에 대한 세상의 이해를 바라지 않았을까 싶다. 한 친구의 말이다. "촛불 들어서 박근혜 정부가 무너진들 내 삶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조국이 장관을 하든 말든 그게 내 학점과 취업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낙담과 냉소의 말이 뼈를 때린다.
책 <386세대유감>(김정훈 외 공저, 웅진지식하우스, 2019)에서 인용된 몇 가지 통계를 인용해 본다. '대학졸업장의 가치(소위 등록금의 투자자본수익률)는 세대별로 얼마나 차이가 날까?'를 조사해봤다. 그 결과 1965년생이 22.3배, 1975년생이 19.7배, 1985년생이 12.3배에 이른다. 86세대에 비해 밀레니얼 세대의 대학졸업장의 가치는 81%나 낮다. 어느덧 같은 대학졸업장이 아닌 셈이다.
세대별 청년시절의 실업률을 살펴보자. 1960년대 생의 경우 3.5%로 완전 고용에 가깝지만, 1970년대 생은 5.7%, 1980년대 생은 9.2%에 이른다. 무려 3배나 실업률이 높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올해 3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청년세대의 확장실업률은 25.1%에 이른다. 4명 중 1명은 사실상의 실업상태의 경계선에서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청년노동의 상대적 가치는 세대별로 얼마나 다를까? 이 통계지표는 각 세대별 20대 후반의 평균소득을 1인당 GDP와 대비한 결과다. 1960년대 생의 경우 평균 연소득이 758.5만 원(1인 GDP 630.4만 원)으로 GDP 대비 120.3%인 반면, 1980년대 생의 경우 평균 연소득이 2151.9만 원(1인당 GDP 2761.2만 원)으로 77.9%에 불과하다. 즉 86세대는 1인 GDP보다 약 20% 높은 월급을 받았지만, 밀레니얼 세대의 경우 23% 낮은 월급을 받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노력의 결과'의 '상대적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 그래서 그냥 '노력'이 아니라 '노오오력'인 것이다. 그런데 '노력의 강도', 즉 '경쟁의 세기'는 훨씬 강해졌다. 경쟁은 죽도록 하는데, 그 경쟁의 결과에 대한 보상은 기대했던 것보다, 그리고 옛날 그 시절보다 적은 것이다.
경쟁의 결과(보상)가 상대적으로 적으니 고단함(상실감)이 크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경쟁의 '기회와 과정'마저 공평하지 않는 넘사벽의 경계가 있다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 여기에 청년세대의 분노와 좌절이 있다. 그리고 왜 청년세대가 갈수록 공정성에 목말라하는지, 그리고 '예외적 특혜와 특권'에 대해서 그토록 분노하고 허탈해 하는지에 대한 작은 단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