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의원에서 발언하는 마루야마 호다카.
마루야마 호다카 트위터
이 민감한 시기에 국회의원이 전쟁을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하는데도 일본 정부는 수수방관만 하고 있다. 2일 오전 정례 기자회견에서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정부 대변인)은 "개개 의원의 발언에 대해 정부가 논평하는 것은 삼가고 싶다"며 마루야마를 방치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 스가 장관은 마루야마에게 도리어 힘을 실어주는 언급을 남겼다. "다케시마가 역사적으로도 국제법상으로도 명확하게 일본 고유의 영토인 점에 비춰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마루야마가 아니라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렸다.
스가 장관은 마루야마 의원이 지난 5월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 발언을 했을 때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러시아가 지배하는 쿠릴 4개 섬을 방문한 마루야마가 '전쟁을 해서라도 되찾아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자, 스가 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진정으로 유감이다"라며 "외교 협상에 따라 북방영토 문제의 해결을 지향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에 변함이 없다"며 신속히 진화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일본 정부는 마루야마의 발언에 대한 대응을 통해 러시아와 전쟁할 뜻이 없음을 신속히 표명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그런 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 개별 의원의 발언이라서 논평을 삼가겠다는 말만 하고 있다.
일본은 1875년에 군함 운요호(운양호)를 보내 강화도에서 시비를 걸고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강요했다. 1894년에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일본 국민과 공사관을 보호하겠다면서 군대를 보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했다. 그렇게 군사적으로 기반을 닦은 뒤 조선 영토를 순차적으로 강점했다. 1905년 2월 22일에는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고, 1910년 8월 29일에는 나머지 조선 땅을 강점했다.
군사와 외교 양 방향으로 전개된 이 같은 조선 침략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바로 정한론(征韓論)이다. 군대를 보내 한국을 치자는 이 주장은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막부 정권(무신 정권)이 무너지고 왕정복고라는 이름으로 일왕(천황)의 지위가 회복된 뒤부터 본격적으로 힘을 얻었다. 정변으로 인한 내부 혼란을 잠재우는 한편, 장래의 대외팽창을 이루려면 한반도부터 차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결과였다.
이같은 정한론을 선도적으로 제기한 인물이 요시다 쇼인(1830~1859년)이다.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형선고를 받고 참수됐지만, 그 짧은 생애 동안에 그는 많은 것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정한론이다.
군사학자인 그는 일본이 서양열강의 압박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조선은 물론이고 만주와 중국까지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부의 침략을 또 다른 외부에 대한 침략으로 이겨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역사학자 이종각의 <원흉과 원훈의 두 얼굴: 이토 히로부미>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옛날 성시(盛時)와 같이 조선을 공격하여 공물을 바치게 하고, 북쪽으로는 만주 땅을 손에 넣고, 남쪽으로는 타이완과 루손 제도를 취하여 일본 땅으로 삼아 더욱 진취의 기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옛날 전성기 때 한국이 일본에 조공을 했다'는 허구의 역사를 근거로 제시한 뒤, 그때처럼 조선을 굴복시키고 나아가 만주·타이완·필리핀까지 차지하자고 외쳤던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일차적으로 침략을 받는 대상은 조선이었다. 조선을 넘보는 이 같은 정한론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계를 지배하는 주요 사상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한반도는 어떻게 일본 손에 넘어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