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상암동 CJ E&M 사옥 앞에서 고 이한빛 PD 유족들에게 CJ E&M이 약속한 재발방지 약속을 이행하라는 플래시몹이 진행됐다. 2019.5.16
김윤정
그런데 나는 왜 이 지경까지 와서도 그들을 배려할까? 왜 사람에게는 그래도 양심이 있지 않나를 구질구질하게 붙잡고 있는가? 아들을 잃은 끔찍한 비극 속에서도 나는 세상을 분명하게 읽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그 시간까지도 나에겐 모든 게 다 비현실적이고 꿈속의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그들은 거대한 골리앗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었다. 기가 죽었고 좌절했다. 전태일 어머님 이소선씨나 이한열 어머님 배은심씨가 갖고 있는 의지의 10,000분의 1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겁나지 않을 텐데, 한빛에게 미안했다. 한빛에게 "한빛아, 엄마는 너를 지켜주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또 비겁하게 주저앉으려고 하는구나. 너한테 받기만 했는데 또 너한테 부탁하고 있네. 한빛아 엄마한테 힘을 주렴" 하며 가슴을 쓸어안고 울었다. 그리고 약속했다. 무너지더라도 다시 또 일어나겠다고.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의 유미 아버님이 가슴을 후비며 다가왔다. 반올림 기사를 보면서 그렇게 많이 공감하고 분노했지만 나는 여전히 집회 참석하는 것도 주저하는 겁쟁이였다. 아무리 억울한 죽음도 철저히 외면하다가 결국에는 돈으로 한 방에 해결하는 재벌에 대한 두려움, 공권력이 진정 평범한 시민의 편이 될까 하는 의구심, 죽음의 원인을 본인의 나약함과 책임으로 돌리려는 회사의 철저한 옹벽에 내가 과연 맞설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꿈에 그들이 여러 마리의 '괴물'로 우글거렸다. 진땀을 흘리며 혼비백산하다가 깼다. 그래. 괴물이었다. 내가 너무 '사람'으로만 이해하려고 했었다. 괴물로 단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자신이 생겼다.
그러나 나의 선택지는 다양할 수 없었다. 사실(Fact)로만 대항해야 했다. 나는 재벌도 언론도 방송도 다 믿을 수가 없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단식투쟁을 할 때 그 앞에서 피자 100판, 치킨, 핫도그 등을 먹었다는 기사를 보고 인간이 어디까지 짐승일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치를 떨었던 기억 때문이다. 그렇게 역공을 당할 것 같아 무서웠다. 한빛을 두 번 힘들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실(Fact)로만 싸운다는 것은 많은 한계가 있었다. '고인을 핑계로 우리 회사 사람들의 명예를 훼손하지 말라'는 협박 앞에 나는 검증하고 또 검증했다. 그동안 민주화 과정이나 재벌과의 싸움에서 피해자들이 어떻게 지난한 과정을 겪어왔는지를 알고 있기에 단어 하나에도 자체 검열을 했다. 평범한 시민이 꿈틀할 수 있는 영역은 좁고 작았다. 절망과 모욕 속에서 싸움을 이어나갔다.
한솔의 <가장 보통의 드라마>도 이런 지난한 과정을 겪으면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말 그대로 슬픈 보고서이다. 그러나 한솔아. 엄마는 너의 용기에 힘을 얻는다. 한빛 형도 응원할 거야. 한솔아 수고했다. 고맙다.
가장 보통의 드라마 - 드라마 제작의 슬픈 보고서
이한솔 (지은이),
필로소픽,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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