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피해자 유가족들이 15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광복 74주년 강제동원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대회’를 마친 뒤 일본 정부의 강제동원 배상판결 이행과 사죄를 촉구하며 일본대사관으로 행진을 벌이고 있다.
유성호
74주년 광복절이다.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과 함께이니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를 새기는 것이 더욱 각별하다. 더군다나 7월 1일 시작된 일본 아베 정권의 수출규제 조치는 경제전쟁 선포에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일방적이고 충격적이었다.
지금 한국사회는 사상 최대의 '일본 제품 불매운동(보이콧 재팬)'이라는 자발적 시민 캠페인 열기로 뜨겁다. 1907년 일제 차관을 갚기 위해 대구에서 시작되었던 국채보상운동, 1997년 국가외환위기를 극복하고자 전국적으로 벌였던 '금 모으기 운동'의 역사적 맥락을 잇는 국민운동이라 할만하다.
이번 한일경제 분쟁의 단초가 되었던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비롯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 독도 영유권 분쟁은 광복절을 앞두고 항상 양국 간의 외교 쟁점이었다. 과거사 해결과 역사정의 문제는 첨예한 외교 갈등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분쟁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슈가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바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과 '도쿄올림픽 방사능 안전성'에 관한 것이다. 광복절에 즈음하여 향후 한일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외교 변수로 떠오를 두 가지 이슈의 의미와 전망을 살펴보자.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은 폐기될 것인가?
지소미아 이슈가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은 7월 18일 대통령과 원내 5당 대표 회담 자리에서였다. 당시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할 경우 맞대응 카드로 지소미아를 폐기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고,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지금은 (지소미아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으나 상황에 따라 재검토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에 대해 나경원 원내대표는 8월 2일 자유한국당 의원총회에서 "지소미아 파기에 이른다면 결국 역사갈등, 경제갈등, 안보갈등까지 가져올 것이고, 북한이 미사일을 쏘아대는 현실에서 대한민국의 무모한 안보 포기가 될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지소미아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는 8월 24일은 지소미아 자동 연장 여부를 확정하는 마지노선이다. 지소미아는 1년마다 갱신되는데, 양국 간 특별한 이의 제기가 없을 때는 '자동연장'되는 협정이므로 오는 24일을 앞두고 한국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입장을 밝혀야 한다. 8월 28일이 일본이 단행한 '한국 화이트국가 배제 시행일'이니 지소미아에 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이 일본의 초강수 경제보복 조치에 대한 향후 대응의 가늠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소미아는 과연 어떤 나라에게 가장 이익이 될까? 놀랍게도 협정 당사국인 한국도 일본도 아닌 미국이다. 한국과 미국은 이미 1987년 88올림픽을 1년 앞두고 지소미아를 체결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일본 정부는 꾸준히 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일 간 지소미아 체결은 궁극적으로 북한을 안보적대국으로 공인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정권이 바뀌고 북한과의 적대정책에서 호흡을 같이하던 이명박 정부는 일본의 집요한 요구를 수용하기에 이른다. 2012년 6월, 이명박 정부 당시 국무회의를 통해 지소미아를 의결했지만 곧 밀실협정, 졸속추진이라는 거센 비판에 직면에 시행하진 못했다. 그만큼 국민정서에 반하는 조치였던 셈이었다.
그로부터 4년 뒤 박근혜 정부가 탄핵 국면에 처한 2016년 11월 23일, 협상 추진을 선언한지 27일만에 지소미아 협정은 졸속적으로 처리되었다. 우스꽝스럽게도 협정 서명 주체가 당시 한민구 국방장관과 나가미네 야스마사 일본대사였으니 얼마나 앞뒤 가리지 않고 처리했는지가 짐작된다. 서명된 문서를 비공개로 조치하자 일선 기자들이 '밀약협정'에 대한 반대의사로 취재를 거부할 정도였다.
이 배경에는 미국이 있다. 미국은 점점 확대되어 가는 중국의 군사안보력을 견제하고 '대중국 안보포위망'을 위해 지소미아와 사드배치를 박근혜 정부에게 압박했다. 한미일 군사동맹체제를 손에 쥐려는 것이었다. 이로써 지소미아는 한일 간에 체결된 군사협정이지만, 북한과 중국을 안보적대국으로 상정하고, 안보 정보를 한미일 3국이 공동 교환하고 보호함으로써 한국을 중국 견제의 첨병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사드배치로 틀어진 한중 외교관계가 더욱 손상을 입게 된 것이다. 결국 미국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된 셈이었다.
궁극적으로 지소미아 폐기의 명분은 충분하다. 일본이 한국의 안보 신뢰 저하를 이유로 화이트리스트 배제 국가로 지정했으니, 역으로 안보 불신국에게 최상위급 군사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장 수출규제 조치에 대한 맞대응 카드라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과연 지소미아가 한국의 외교안보 측면에서 얼마만큼의 실익과 손해가 있는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설계도에 따라서 '중국을 포위하는 한미일 안보동맹체제'에 한국이 어정쩡하게 끼어들어가는 것은 중국의 막대한 영향력 부상이 예측되는 동아시아 질서재편에서 매우 위험스러운 요소이다. 우리는 과거 미국 압력에 의한 사드배치 과정에서 중국의 경제보복 조치에 난감함을 넘어 경제적 손실을 감내해야했던 우려스러운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한반도평화프로세스가 전 세계의 관심과 지지 속에서 진전되어 가고 있는 때에 북한과 중국을 잠재적 안보적대국으로 상정하는 지소미아가 과연 국익과 평화 정착에 도움이 될 것인지는 면밀히 검토되어야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과 맺은 최초의 군사협정인 지소미아는 동아시아에서 군사대국화의 국정목표를 향해 충실히 이행해 가는 아베 정권에게 '한반도 문제의 개입과 영향력 확대'라는 명분과 빌미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작동할 것이다.
호시탐탐 한반도 진출을 노리는 아베 정권에게 역사왜곡, 경제보복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안보 정보까지 제공해야할 이유가 정말 있는 것일까? 만약 지소미아 체결의 명분과 실익이 확실했다면, 왜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국민들에게 들킬세라 졸속적이고 은밀하게 이 협정을 체결하려 하였을까?
지소미아는 파기의 문제가 아니라 협정 체결의 정당성마저 검토해야 하는 중대한 국가 사안임이 분명하다. 작금의 한일 간 역사분쟁과 경제전쟁의 시원이 박정희 정권의 밀실협약이었던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국민 앞에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지 못하고, 절차마저 왜곡하는 외교협정이 국익과 국민 의사에 적합할리 만무하다.
한국에 대한 안보 신뢰를 저버린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에 대해 이번 기회에 지소미아를 폐기하고, 새로운 한일 간 외교안보 관계 수립을 위한 국민 앞에 당당한 절차를 진행하는 것이 국민의 정부다운 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