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형기록표의 김성숙 선생수형기록표의 김성숙 선생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김성숙의 오래된 꿈은 삼촌처럼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3ㆍ1혁명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고 각급 사회단체와 불교단체에 들어가 활동했으나 성이 차지 않았다. 더욱이 3ㆍ1혁명 후 일제는 내세우기는 '문화정치'였지만 실제로는 더 강화되고 악화된 식민통치였다. 가히 조선반도에서는 의식있는 사람이 숨도 쉬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산중 불교라고 다르지 않았다.
반면에 중국(만주)에서의 상황은 크게 달랐다. 1919년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11월에는 길림에서 의열단과 서로군정서가 조직되었다. 1920년에는 만주일대에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로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대첩'을 이루었다.
1921년 3월에는 의열단원 김익상ㆍ오성윤 등이 상하이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했으나 실패하고 피검되었다. 1922년 10월 남만주의 한족회와 광복군총영이 환인현에서 대한통의부로 통합하여 무장투쟁에 나섰다. 이처럼 우리 독립운동이 활기차게 전개되고 있었다.
중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소식은 간간히 봉선사에도 들려왔다. 민족운동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는 김성숙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이미 의열단 계열 인사들과 은밀히 접촉하고 있었다.
1922년 5월 19일 3ㆍ1혁명을 주도하던 의암 손병희가 옥고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독립운동의 선각으로 우러렀던 의암의 순국 소식에 김성숙의 아픔은 컸다. 이런저런 사회운동 단체에 참여하면서 점차 활동이 자유롭지 않았다. 일제 경찰의 그림자가 사찰 주변을 얼씬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