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장님에게 한소리 듣거나 회의에서 깨지고 오면 '나 지금 화났어'라는 분위기를 뿜어냈다. 다른 직원들이 속으로 '왜 저래?'하고 넘길 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사진은 tvN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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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가 진짜 사람을 잡았다. 퇴사하자마자 그녀가 나를 피하는 태도가 역력했던 것이다. 연락도 잘 안 되고, 겨우 오는 문자도 사무적이었다. 내가 어학연수를 떠나기 전에 차 한잔 마시자고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더니 결국 나중에는 시간이 안 돼서 못 볼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무리 시간을 돌려봐도 기억나는 사건이 없었다. 서운함이 가슴에 얹혀서 내려가질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메일로 이유를 물었다.
"사실 저 언니 때문에 힘들었어요."
답신에 적힌 그 말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후배에게 이런 폭탄선언을 들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인간적으로도 좋아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내 딴에는 배려를 한다고 했는데, 후배 입장에서는 열정이 넘쳐서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 팀장이 힘에 부쳤던 모양이다. 편하다는 이유로 가끔 내 업무 하중을 그 친구에게 넘긴 것 또한 그녀 입장에서는 부담이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힘든 건 심기 관리였다. 나는 사장님에게 한 소리 듣거나 회의에서 깨지고 오면 '나 지금 화났어'라는 분위기를 뿜어냈다. 다른 직원들이 속으로 '왜 저래?' 하고 넘길 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의지했던 만큼 그녀는 내 심기관리의 부담까지 지면서 감정노동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다 해도, 은연중에 '그래도 네가 대리인데 팀장인 나를 이해하고 도와줘야지'라는 메시지를 그녀에게 보냈을 것이다. 정확한 선을 긋지 않은 관계는 그녀를 혼란스럽고 불편하게 하는 참사를 일으켰다. 내가 사장님과 팀원 사이에서 남모르는 수고와 스트레스로 힘들어할 때, 그녀도 분명 나와 팀원들 사이에서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을 텐데. 그것까지는 헤아리지 못했다.
"언니가 그만둔다고 하니까 솔직히 해방감이 느껴졌다"는 말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내 마음을 서늘하게 베었다. 곪아 있던 감정이 터지면서 후배도 자기 감정의 실체를 처음으로 직면한 눈치였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를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마음 반, 부담스러운 마음 반이다 보니 그녀 역시 혼란스러웠을 테다.
그 메일을 읽고 마음이 아팠다. 연애하다 헤어졌을 때보다 더 욱신거렸다. 미움과 배신감, 미안함과 후회가 뒤섞여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그녀를 배려하고 좋아한 내 노력과 마음이 한순간에 부정 당하는 것 같아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그곳에서의 시간이 모두 실패로 낙인찍히는 것 같았다.
돌아보면 그때는 후배도, 나도 서툴렀다. 내 입장에서는 '내가 이만큼 하니까 네가 나를 위해 그 정도 해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배 입장에서는 직장맘인 그녀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내가 얼마나 그녀의 일을 대신 떠맡고, 그녀의 승진을 위해 얼마나 사장님께 어필했는지 알 턱이 없었다. 후배 입장에서도 내가 알아채지 못한, 억울하고 차마 말하지 못한 사연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서로 적당한 선에서 표현하는 생색과 솔직함은 필요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1년 뒤, 나는 어학연수에서 돌아왔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때 누가 먼저 연락을 했는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떻게 풀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다른 직원들과는 연락이 끊겼는데, 그녀와는 가끔이긴 해도 서로 안부를 나누며 산다는 사실이다. 14년도 지난 지금까지도. 뿐만 아니라 이직해서 다른 잡지 회사에 다니고 있는 그녀가 프리랜서인 내게 일을 주기도 한다. 이제 그녀가 갑, 내가 을로서 공생하고 있다. 삶은 참 재미있다.
그때는 그게 우리의 최선이었을 거야